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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교계일반

『공평과 정의』 삼상30:18~25

“진정한 공평은 나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공평이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기꺼이 나누어 가지는 곳에만 참된 공평이 있다.”  (그림_예디자인 안재은 제공)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라는 노래를 들으며 자랐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잘살게 되었냐”고 물어보면 망설임 없이 YES라 답한다. “그래서 살맛나는 나라가 되었냐”고 다시 물으면 대답을 주저하거나 NO라고 대답한다. 

  또, 우리 사회가 살맛 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가장 많은 대답이 “양극화와 불평등”이라 한다.   소득과 자산의 격차가 심해지고 있다. 오를 대로 올라버린 부동산 가격의 혜택을 누린 세대도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장벽이 되어버린 세대도 있다. 공평과 정의가 무너지면 가정과 사회가 하나 되지 못한다. 갈등과 분쟁이 일어난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공평과 정의를 부르짖는다.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공평과 정의를 이루겠다고 말하지만, 오늘도 공평과 정의를 부르짖는 시위와 투쟁과 파업과 협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공평과 정의의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이 사회를 바라보며 목사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그것은 사회 문제이기 전에 성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성경 앱에서 “공평과 정의”를 검색하면 다섯 구절이 나온다(사9:7, 렘4:2, 렘22:3, 렘23:5, 렘33:15). 

  하나님은 공평과 정의가 무너진 유다 나라를 앗수르와 바벨론을 통하여 징계하셨고,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에게 외쳤다.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고!

  이사야와 동시대 선지자인 미가도 외쳤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예언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다. 그리고 교회를 설립하셨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세워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공평일까? 사회 곳곳에서 공평과 정의를 주장하는 목소리대로 모두 다 해주면 공평한 사회가 될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저마다 자기중심적인 공평을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 내 편에서의 공평이 상대방에게는 불공평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자식에게 공평한 부모, 교인들에게 공평한 목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3살 터울인 두 아이에게 핸드폰을 사 줘야 할 때 딜레마에 빠졌다. 같은 해에 사 주는 것이 공평일까? 같은 나이에 사 주는 것이 공평일까? 답을 찾을 수 없었고, 어느 것도 공평이 아니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공평은 신기루였다는 것을 깨달았 다.

  사무엘상 30장에서 비로소 공평의 진정한 의미를 찾게 되었다. 

  사울의 추격을 당하는 다윗에게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큰 무리가 되었다. 이들은 사울의 추격을 피해 블레셋 땅 시글락에 정착한다.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자 다윗과 그의 병사들은 블레셋의 군대 소집에 응하지만 하나님 은혜로 참전하지 않고 시글락으로 돌아오게 된다. 처자가 반겨 맞아줄 것을 기대하며 지친 몸으로 돌아온 그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불타고 있는 시글락이었다. 처자와 가축과 소유를 아말렉 사람들이 빼앗아 간 것이다. 그들은 울 기력이 없도록 울었고, 심지어 다윗을 돌로 치려는 사람도 있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용기를 냈다. 아말렉 사람을 따라잡아 빼앗긴 것을 되찾아 오리라는 하나님의 응답을 듣는다. 다윗은 이미 지쳐있는 6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아말렉을 막연하게 추격한다.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갔다. 지칠 대로 지친 200명은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한 채 주저 앉았고 400명만 데리고 갔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아말렉을 순적하게 만났고, 그들이 잔치하느라 방심한 틈을 타 공격하여 모든 처자와 가축과 소유물을 다 되찾아 올 수 있었다. 아말렉이 다른 지역에서 탈취한 전리품까지 합쳐 엄청난 양의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온다.

  그때 400명의 병사 중에서 악한 자들과 불량배들이 공평을 주장하고 나선다. 시냇가에 있던 200명에게는 처자만 돌려주고, 전리품은 자기들만 차지하겠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싸웠고, 자기들이 전리품을 획득했으니. 나는 초신자 시절 이들의 주장에 설득당할 뻔했다. 일견 그것이 공평처럼 보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공평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공평이었으며, 다른 사람에게는 또 다른 불공평이었다. 다윗이 이들의 주장을 따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400명 중에도 공로가 더 많은 사람이 더 차지하겠다고 나섰을 것이다. 전쟁 때마다 공평의 문제로 시비하며 다윗의 공동체는 구심점을 잃고 분열하여 해체되었을 것이다.

  다윗은 말한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셨다. 여호와께서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다. 여호와께서 이 전리품을 우리에게 주셨다. 은혜로 받은 것이니 시내를 건너지 못한 200명의 병사와 똑같이 나누어 가져야 한다.” 다윗이 주장하는 진정한 공평에 모두가 동의했다. 200명과 그의 가족들은 이 공평에 감사했고, 400명의 용사는 자기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시선을 돌리며 감사했다. 전쟁 때마다 이것이 변치 않는 원칙이 되었고 ,다윗의 공동체는 더욱 견고해졌다.

  진정한 공평은 무엇일까? “나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공평이다. 그것은 곧 은혜로 받은 것이니 기꺼이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기꺼이 나누어 가지는 곳에만 참된 공평이 있다.

이상호 목사(남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