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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교계일반

“고린도는 어떻게 상업적으로 번성했는가?”

평신도의 관점에서 고린도 서신을 잘 이해하면 바울서신 전체의 밑그림이 그려질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고린도 도시의 역사/지리적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표를 같이 보면서, 천천히 읽어보세요)

   고대 고린도는 기원전 8세기경 철제 무기를 사용한 도리아인들(원래 그리스 북쪽에 거주)이, 청동 무기를 사용하던 남부 그리스 미케네인을 물리치고, 그리스 남부를 정복하고 정착했다. 도리아인들은 점령지 중에서 고린도를 경제 중심지로, 아르고스를 문화 중심지로, 스파르타를 군사 중심지로 삼았다.

  경제 중심지 고린도는 두 주요 항구를 통해 아드리아해(레카이온 항구)와 에게해(겐그리아 항구)를 연결하는 교역로의 중심에 위치하였다. 기원전 7세기경, 그리스 독재 군주 페리안드로스는 고린도 지역의 고린도만(아드리아해)과 사로코니스만(에게해) 사이 약 7km의 육지를 파서 운하를 만들 계획을 했다. 그러나 당시의 기술로는 운하를 만들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페리안드로스는 대안으로 선박을 육상으로 끌어올려, 현재의 레일 위에 기차처럼, 지상으로 선박을 올려서 옮기는 디올코스(선박을 육상으로 옮겨 이동하는 시스템)를 개발했다.

디올코스는 지금으로 보면 거의 아이폰 혁명과 같은 혁신적인 기술이었다. 이는 선박과 화물과 인력을 분리하여 약 7km의 육로로 하루 안(6~8시간)에 옮기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고린도 남부 해안(펠로폰네소스 반도)을 돌아가는 약 300km의 거리를 줄이고, 폭풍의 위험도 피할 수 있었다.

  고린도 도시는 이 디올코스의 사용에 대한 통행세와 사용료를 부과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또한 배를 이동시키기 위한 많은 노동자와 기술자 등이 필요하여 고용 창출 효과가 컸으며, 통나무 롤러/운반대/창고/음식숙박업 등 장비의 제작/유지보수 산업과 관련된 서비스 산업도 발달했다.

이로 인해 고린도 지역과 주변의 무역이 크게 활성화되었으며, 고린도에는 많은 무역상, 디올코스 종사자, 장인 그리고 농업 종사자 등 다양한 계층이 고린도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디올코스에 대하여 좀 더 설명하면, 디올코스는 그리스어로 dia(통과하여/가로질러) holkos(끌다/당기다)로 ‘가로질러 끌어가는 길’이다. 이는 위의 지도에서 표기했듯이 고린도만(서쪽)에서 사로니코스만(동쪽)을 연결하기 위하여, 해상의 선박을 육상으로 끌어올려, 육상의 괘도 도로를 이용하여 선박을 운송하는 경로를 의미한다. 이동 방식은 초기에는 배의 밑에 둥근 통나무를 깔고 굴리는 방식으로 이동했고, 발전하여 엘카(손수레)처럼 선박을 바퀴 달린 운반대 위에 올리고 끌었고, 바퀴는 디올코스 도로에 파진 U자형 홈을 따라 굴러가게 하였다.

“디올코스는 300km의 긴항로를 대신하는 7km의 석회암으로 포장도로로, 육지로 올려진 배를 수레에 실어 하루 안에 이동하게 하는 획기적인 방법이다.”(사진_민석규 블로그)

  페리안드로스(재위 BC627-585)때 건설한 이 디올코스(약 7km)는 화물선은 물론, 군사용 전투선의 이동에도 활용되었는데, 펠로폰네소스 전쟁(BC431-BC401)에서 이 디올코스가 군사적 수송로로 사용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잠시 살펴보면, BC 478년 페르시아를 막기 위한 공동방위 협력체인 ‘델로스 동맹’을 아테네 중심으로 결성했는데, 이 델로스 동맹이 아테네 만의 군사적 이익으로 변질이 되자, 이에 반발한 스파르타는 그리스 전체 패권을 놓고 아테네와 싸운 전쟁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린도는 도리아인이 남하할 때 스파르타와 같이 개발한 도시였다. 아테네도 황금알을 낳는 디올코스가 있는 고린도를 점령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을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붕괴시켰으나, 스파르타는 통치력의 부족으로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했으며, 그리스 북쪽의 테베 왕국이 일시적으로 부상했다가,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 2세가 그리스의 패권을 잡았고, 알렉산더 대왕은 헬라 제국을 만들었다. 당시 필립 2세의 이름을 딴 도시명이 빌립보인데, 빌립보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소아시아(드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가 처음 개척한 빌립보 교회였음을 기억하자.

  기원전 146년, 고린도(그리스)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당시 로마 장군 루키우스 뭄미우스는 도시를 잔인하게 고린도를 약탈하고 파괴했다. 고린도의 많은 시민이 살해되거나 노예로 팔렸으며, 고린도 도시의 모든 재산과 예술품은 로마로 운반되었으며, 이후 약 100년 동안 고린도는 폐허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4년 고린도를 로마 식민지로 재건하여, 로마 시민(특히 은퇴한 군인), 해방된 노예, 상인 등이 이주하며 고린도가 다시 번영하기 시작했다. 

     고린도는 로마 식민지로서, 로마법의 보호를 받았고, 로마의 성향이 짙은 그리스 도시가 되었다. 상업과 무역이 다시 활성화되면서 도시가 팽창했으며, 풍부한 재정을 바탕으로 고린도 당국은 문화와 예술을 지원했다. 공연은 극장(대공연장)과 오데온(소극장)과 아고라(광장) 등 다양한 장소에서 다채롭게 이뤄졌다. 한편 로마는 아프로디테 신전을 보수하고, 여러 신전을 건축하였으며, 로마처럼 수도시설과 공중목욕탕 등 고린도의 인프라를 건설하여 작은 로마를 만들었다.

  고린도 도자기는 로마에 유명한 수출품이었으며, 은/금/구리를 활용한 금속 가공업도 크게 발달하였다. 또한 고린도는 직물과 섬유 제품의 주요 생산지였으며, 염색된 천은 특히 유명했다. 그 밖의 다양한 상품들(향신료, 약초, 올리브유, 와인, 미술품 등)이 고린도를 통해 유통되었다.

 로마의 식민도시로 태어난 고린도는 로마의 상업 및 군사 거점으로 발전했으며, 디올코스도 무역과 군사 운송의 핵심 인프라로 운영되었고, 디올코스는 여전히 고린도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고린도는 상업이 번성하면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다민족 도시였다.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고린도는 여전히 종교적 중심지로, 다양한 이교도 신전(아프로디테, 아폴로 등)이 존재했고, 성적 문란하고 우상 숭배와 사치가 심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개척된 고린도 교회가 문제가 없을 수는 없었다. 다음에는 고린도 교회로 한 발짝 더 들어가 보기로 하자.

 

서동호장로(울산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