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의 첫 문장은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으로 시작한다. “도를 설명하여 도라고 하면 이미 도가 아니고 어떤 것에 이름을 붙여주면 이미 그 이름이 아니다”는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본질을 단어로 규정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이미 동양 철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로 불리는 오늘날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이런 풍토 속에서는 정확한 정의보다는 파토스적 상징이나 대중적 감성이 모든 소통과 논의를 주도한다. 실체를 분명히 구별할 수 없지만 말하는 사람마다 실체를 너무도 분명히 규명하고 있는‘좌파’와 ‘우파’가 좋은 예일 것이다. 입지점에 따라 상대적일 수 있는 개념이 절대적인 실체를 가진 것 같이 여겨지는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 회자되는‘복음주의’라는 단어도 이와 비슷하다. 사용하는 사람마다 입장이 다르다. 복음주의 또는 신복음주의를 자유주의에 결탁한 신학 사조 쯤으로 생각하는‘의식 있는’근본주의자를 제외하면 한국의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복음주의자로 또 섬기는 교회를 복음주의 교회로 생각한다. 또한 진보적인 신학을 표방하는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교회는 보수주의, 복음주의, 근본주의 간의 큰 차이점을 감지하지 못하고 동의어로 취급한다.
이렇게 복음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한국 교회의 논의가 저마다 다르다보니 복음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간의 논의와 연대는 혼란과 분열을 반복하는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더군다나 현재 우리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의 진보 또는 성숙을 막는 집단으로 일반화되어 매도되고 비판받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복음주의의 역사적인 뿌리와 정체성을 살펴보아 본질적인 특성을 파악하고 이에 따라 한국에서 복음주의 교회는 어떤 식으로 존재해야 하는지를 논의하는 일은 사회적 지탄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오늘의 한국 교회가 대면해야 할 필수불가결한 책무가 아닐 수 없다.
복음주의의 특성과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
그동안 복음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이 제안되었다. 복음주의에 대한 이해가 다양한 이유 중 하나는 복음주의라고 불리는 운동 또는 신학적 사조가 언제나 자기 나름의 다양한 시대적 환경에서 태동되었기 때문이다. 현대교회사만 보더라도 영국에서 복음주의가 회자된 역사적 정황과 미국에서 복음주의가 태동된 정황은 매우 다르다. 또한 남미를 중심으로 하는‘소수파’복음주의는 신학적 내용에 있어서 영미를 중심으로 한 ‘주류적’복음주의와 공통분모가 있음에도 사회·역사적 정황상 강조점이 매우 다르다. 이런 면에서 한국의 복음주의는 더욱 정의하기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미국 신학과 교회에 영향을 많이 받았던 초기 한국 교회 이후 복음주의적 선교 단체의 영향과 유럽과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70~80년대 그리고 교회의 정치적 참여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된 80년대 중반 이후의 운동들이 섞여서 한국의 복음주의는 영미에서 보이는 혼란보다 더 많은 혼란을 양산하고 있다. 이런 다양성과 함께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보이는 ‘신학하기(doing theology)의 부재’는 한국 교회에서도 나타나 치열하고 적실한 신학적 논쟁을 아예 피하는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국 교회에서는 복음주의 신학과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렇다면 ‘복음주의 교회’를 정의하기에 앞서 반드시 정의해야 할 ‘복음주의’를 어떻게 규정하고 논의를 전개해야 할까? 그동안 다양한 공통분모를 중심으로 복음주의 교회를 규정하려는 시도가 있어 왔고 앞으로도 이런 논의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본고에서 복음주의가 가지는 중요한 두 요소인 ‘복음’과 ‘상황’을 복음주의의 특성으로 가름하려 한다. 즉 복음주의는 ‘변하지 않는 복음’을 자신이 발 딛고 살아가는‘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 어떻게 적응하려 하는가에서 나타났다.
가톨릭교회의 권위 아래 복음이 빛을 잃은 종교개혁 당시에는 프로테스탄트라는 용어로 대체되기 전까지 프랑스어 ‘에방겔리크’와 독일어 ‘에판켈리쉬’라는 단어로 종교개혁시대의 ‘복음주의’를 표현했다. 청교도 운동이나 경건주의 운동에서도 윤리적 삶의 현장과 개인적 체험이라는 장에서 복음을 살아내려 할 때 복음주의적 특성이 나타나곤 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에서 ‘복음주의자’란 한국 사회의 사회·역사·정치·문화적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 속에서 어떻게 자신들이 믿는 복음을 살아낼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구체적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살아내려고 하는 교회를 ‘복음주의 교회’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 점에서 한 가지 반드시 부가해야 할 설명이 있다. 복음을 이해하고 상황을 해석하는 기능인 이성 또는 합리적 사고의 위치다. 상황에 대한 이해와 해석 없이 성경만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성경이 애초에 그렇게 쓰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상황에 대한 얕은 인식이라도 있어야 실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성경이나 상황에 접근할 때 이성과 합리성의 기능을 어느 정도 인정하느냐다.
계시와 이성의 오래된 논쟁도 이 주제에서 비껴나기 힘들다. 다르게 표현하면 계시 이외에 다른 지식은 필요악은 아니어도 불필요하다고 믿는 분파가 근본주의라면 계시의 빛 아래에서라면 성경을 해석할 때나 상황을 이해할 때 이성적이고 합리적 탐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분파가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이 표현 역시 정확하지 않지만)는 이성과 합리적 탐구에 계시가 구속력이나 전제점을 제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파라고 할 수 있으니 복음주의와 자유주의는 이 지점에서 분리된다. 근본주의가 계시에 갇혀 있고 자유주의가 이성으로 무제한의 자유를 누린다면 복음주의는 계시에 뿌리박고 상황 속에서 이성적 탐구를 지속하는 자세를 취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 복음주의 교회가 있는가? 지성의 순기능 자체를 무시하고 인문사회과학이 됐든 자연과학이 됐든 지성적 탐구 자체를 폄하하는 복음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성경의 해석과 상황에 대한 이해를 통한 신학하기(doing theology)가 없다면 복음주의교회라고 부르기 힘들다. 이런 면에서 통계적 조사는 없었으나 한국에서는 복음주의 교회가 많지 않다고 볼 수밖에 없다.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서 더 나아가 상황을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시도가 한국 교회에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80년대 정교 분리를 외치며 침묵하던 교회들과 교회 인사들이 최근에 정치적 발언과 행동을 하고 대형 집회를 주도하는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들에게도 상황에 대한 이해가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상황에 대한 이해와 이에 따른 실천이 있으니 이들도 복음주의자라고 불러야 하는가?
이성과 합리적 탐구의 특징은 토론과 소통이다. 그런데 토론과 소통이 부재한 상태 다시 말해 지성은 있으나 균형을 잃은 지성으로 상황을 이해하고 이와 관련하여 성경을 해석하여 행동한다면 이를 ‘복음주의적’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키기는 어렵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반도가 처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즉 정치적 입장에 따라 복음주의가 양분되는 듯하다. 이는 사회 역사를 읽어내는 데 복음의 총체성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논의가 일천한 데서 기인하는 문제로 볼 수 있다. 현재 한국의 복음주의가 연대하지 못하고 다소 혼란과 무기력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가장 큰 원인은 신학적인 영역보다는 상황에 대한 상이한 해석에서 찾을 수 있다. 복음의 총체성을 이야기하지만 그 복음을 적용해야 할 상황에 대해 견해가 다를 뿐 아니라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서 양립할 수밖에 없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한국의 복음주의는 분열할 수밖에 없다. 복음주의는 늘 상황에 뿌리박고 복음을 꽃피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성경과 관련되어 믿는 바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을 보다 선명하게 하고 나아가 한국 사회를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연구와 토론을 통해 상황에 대한 통합적 인식에 이르러야 한다.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발견할 수 있듯이 복음주의자와 그 교회는 계시에 신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정직하게 이성을 활용하여 성경과 상황을 이해. 해석하고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내는 자들이며 이런 가치가 구현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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