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권에 “Don’t harp on that, please.”라는 말이 있다. 하프는 손가락을 튕겨서 소리를 내는 악기이다. 처음에는 듣기 좋은 소리인데 하루 종일 지리하게 같은 음을 계속 튕기면 얼마나 짜증 나겠는가?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있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지”이다. 그런데 하루 종일 평생 들어도 또 듣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사랑해”이다.
“천만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말, 사랑해”
김세환씨가 불렀던 “사랑하는 마음”에 나오는 가사 중 일부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배신하고 다시 고기 잡으러 간 베드로를 만나러 가셨다. 그리고는 물어보신다. “베드로야, 너 나 사랑하니?”, “네 주님” 다시 묻습니다. “베드로야, 날 사랑하니 진짜로?”, “네 주님 사랑해요” 다시 세 번째 귓가에 묻습니다. “베드로야 너 정말 나 사랑하니”,“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왜 예수님이 배신하여 마음이 유약한 베드로에게 “날 사랑하니?” 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물었을까?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예수님도 사랑한다는 말을 자꾸 듣고 싶어셨던 것은 아닐까?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만드셨다. 산과 물 그리고 작은 곤충과 나무 바위들도… . 그래서 ‘바람의 빛깔’이라는 노래는 모든 만물과 짐승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사람들만이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지는 마세요. 나무와 바위 작은 새들조차 세상을 느낄 수가 있어요.(중략) 달을 보고 우는 늑대 울음소리는 뭘 말하려는 건지 아나요“
자연 만물 속에서도 하나님의 숨결이 베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무한대의 하나님의 호흡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든 이 작품을 멸시하거나 무시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리가 만무하다. ‘여자의 후손이 오면 뱀의 머리를 상하게(박살) 한다’는 표현이 과한 것이 아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솜씨를 멸망으로 이끄는 것을 싫어하신다는 반증이다.
아이들의 발달기에 관한 연구를 많이 한 ‘존 볼비의 애착 이론’은 자라나는 아이의 발달이 양육하는 이들과의 상호 소통에 따라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만약 아이가 자기 괄약근으로 만든 배변을 엄마나 교사가 더럽다고 소리를 지르거나 함부로 손상시키면(아기의 변을 빨리 치워버리면) 아이들은 자기의 작품이 무시를 당했다는 생각에 일그러진 자아가 형성된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비워 우리를 사랑하셨다. 독생자를 주셨다. 그 아들과 더불어 온갖 좋은 것을 은사로 주셨다. 그런데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자기 백성이 자기 땅에 왔는데도 영접하지 않는다고 한탄하셨다. 영접하지 않으면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기독교는 그릇싸움이 아니라 담는 싸움이다. 질그릇에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 내가 결정되어진다. 종교는 ‘되는 싸움’을 가르친다. 그래서 힘과 애를 써서 궁극적인 목표점에 도달하게 한다. 결국은 허무로 막을 내리게 될 것이다. 하늘에서 은혜의 소낙비가 쏟아져도 뒤집어진 잔에는 한방울도 담기지 않는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성경은 영접을 강조한다. 받아들이면 내 것이 되는 것이다.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 만들어낸 도덕과 윤리 이데올로기는 근본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달리면 달릴수록 넘쳐나는 악이 쏟아져 나온다. 사랑하는 사람의 청혼을 받아들이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그 사람이 준비한 행복한 모든 것을 누리게 된다. 바람도 밤도 햇빛도 받아들이면 꽃이 된다. 예수의 생명을 영접하면 예수생명을 얻는다. 예수능력을 수용하면 예수님의 능력을 누린다.
어리석은 자는 말이나 태도를 통하여 타인과 거리를 둔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관계와 평생 쏟아낼 말의 총량이 얼마나 되겠는가?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14:1)고 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을 배척한다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을 쉽게 비난하고 배척하는 이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얼마나 자연스럽겠는가? 만고의 진리다.
믿음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비천, 풍부, 배부름, 배고픔, 풍부, 궁핍’ 등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접신앙이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역사의 종말에서 승리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오늘을 바라보면 그분의 섭리 안에서 현재를 영접하며 가는 것이다.
새해에 새로운 해가 떠 올랐다. 우리에게 주어질 모든 것을 기대하면서 기도하고 기다리자.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 올해는 땅부자! 되시기를 바란다.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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