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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발행인칼럼

"예수님의 눈"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막5:41) (삽화_동행여정 티스토리)

1500년대 초 이탈리아의 플로렌스에 ‘도나텔러’라는 유명한 조각가가 있었다. 그는 자기 생애 최고의 조각 작품을 한번 남겨 보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좋은 대리석이 나오기로 유명한 ‘카레나’라는 지방으로부터 비싼 값을 지불하고 많은 대리석을 사 왔다. 그러나 막상 사 온 대리석을 채석장에 갖다 놓고 살펴보니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군.” 하고서는 대리석을 모두 성당 뒤뜰에 버렸다. 
  얼마 후 그에게 수련을 받던 무명의 한 조각가가 뒤뜰에 버려진 대리석을 보았다. “잘만 쓰면 괜찮은데,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겠는데.”라며 그중 몇 개를 가져다가 2년 동안 모든 열정을 쏟아 부어 조각을 했다.
  2년 후, 1504년 1월 25일, 플로렌스의 많은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이 조각상을 덮고 있던 베일이 걷혔을 때 시민들은 흥분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다. 그 무명 조각가는 거친 대리석 속에서 위대한 조각품의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오셔서 거친 대리석 같은 우리를 보시고 그 안에서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위대한 가능성의 사람들을 바라보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찾아내시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그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는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하시고, 며칠 지난 후에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하셨다. 그 시대에 가장 멸시받던 자들인 어부와 세리를 부르신 사건은 보통 사건이 아니다. 세리는 그 시대에 가장 기피 인물이었다. 세리들이 저지른 일은 유대인들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런 자들을 부르신 예수님의 마음과 눈은 우리의 눈과 달랐다. 바로 예수님만이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왜 이런 자들을 부르셨을까? 그들 안에 꿈과 희망이 있음을 보시고 부르신 것이다. 예수님은 현재만 보지 않으시고 미래와 가능성을 보신다.
  그들 안에 있던 가능성이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죄인이 예수님을 발견하는 데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사람 속에 죄인 그대로의 사람이 들어 있으면 마귀의 화신 밖에는 못 된다. 하지만 죄인 안에도 예수님이 임재하시면 완전히 새사람으로 바뀌어 천하를 호령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정치, 경제, 문화, 등등 나라에 총체적 난관에 부딪쳐 있다. 이런 절망의 시대에 빠져 만나는 이들마다 나라를 위해 걱정하지만 진정 우리가 해결할 길이 막막하다. 우리는 희망을 보는 눈이 없어 눈 앞의 절망에만 안절부절한다.  
  성경에 절망에 빠진 한 여인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하루는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가 12살 되는 자기 딸이 죽어가자 예수님에게 와서 엎드려 절을 하면서 간곡히 부탁한다. 오셔서 딸을 살려달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시는 중에 12년 동안이나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만나신다. 이 여인은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고 결과는 아무것도 나아진 것이 없을 뿐더러 도리어 시간이 지나면서 더 중하여지기만 하였다. 그녀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니 혈루 근원이 나아버린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면 절망의 문제도 끝이 나고, 절망은 희망으로 변한다.
  한편, 예수님이 시간을 지체하고 늦게 가는 바람에 야이로의 집 사람들이 와서 딸이 죽어 장사 지낼 준비를 한다고 했다. 예수님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신다. 그리고는 회당장의 집에 가서는 떠들고 울며 통곡하는 사람들에게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고 잔다”고 하시고는 그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셔서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하시니 아이가 살아났다. 우리의 눈에는 다 죽었고 소망이 없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생명이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죽은 것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 아니 다 죽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다 살아날 수 있다. 어둡고 절망적인 세상이지만 우리 육신의 눈으로만 보지 말고 예수님의 혜안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주님의 눈과 마음으로 살아나는 역사를 바라보길 원한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9:36)

울산의 빛 발행인 옥재부 목사(북울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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