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계/교계일반

"어거스틴의 삶과 신앙"

  오늘은 교부철학자 어거스틴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어거스틴은 철학과 교회사의 중요한 인물이다. “어거스틴”은 일반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라고도 많이 쓰이지만, 본 글에서는 우리에게 친숙한 어거스틴으로 하기로 한다. 참고로 비슷한 이름인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는 로마 1대 황제로 옥타비아누스다.

  어거스틴은 AD 354년 현재 아프리카 알제리 타가스테라는 곳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인 기도의 어머니 모니카였으며, 아버지는 로마 하급 관리였다. 6살이 되어 어거스틴은 문법학교에 입학했다. 어거스틴은 공부보다 노는 것을 더 좋아했고, 놀면서도 시험을 치면 일등만 하는 비상한 학생이었다.

  어거스틴은 15세 문법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32킬로 떨어진 마다우라에 있는 상급학교로 진학하여, 문학과 수사학을 공부했다. 수사학(논리학과 윤리학을 통해 타인을 설득하는 학문)은 당시 출세하려면 필수로 배워야 할 학문이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국영수+논술을 합친 것과 같다. 

  1년 정도 지났을 때 어거스틴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어거스틴은 교회와도 담을 쌓고 죄를 짓고 방탕의 길로 빠져들었다. 어거스틴은 훗날 고백록에서 ‘죄를 지어 무엇을 얻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일 자체가 즐거움이었다’라고 고백했다. 17세 때 어거스틴의 아버지의 친구의 도움으로 카르타고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당시 카르타고는 로마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카르타고 유학 시절에 18세에 어거스틴은 여자와 동거하여 아들(아데오다투스)을 낳았으며, 어거스틴의 방탕은 기도의 어머니 모니카의 근심이 되었다. 

  그 무렵 어거스틴은 키케로가 쓴 철학 서적인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이 책은 어거스틴에게 철학과 진리에 대한 강한 열정을 일으켰으며, 어거스틴이 신(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계기도 되었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열정은 어거스틴을 신흥종교였던 마니교에 빠지게 했다. 

  마니교의 창시자 마니는 자신이 그리스도요 성령과 보혜사라고 자칭하며 세력을 얻었고, 마니는 처형되었으나, 마니의 추종자들이 늘어 당시 매력적인 신흥종교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마니교는 육신은 악하고 오직 영혼만이 선하다고 가르쳤다. 죄를 짓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죄를 짓게 하는 본성 때문이어서, 죄를 짓는 일이 그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고 했다. 이러한 마니교의 교리는 어거스틴을 짓누르고 있던 죄의식을 한순간에 사라지게 했다.

  21세에 어거스틴은 카르타고에서 수사학 교사 자격을 얻었다. 카르타고에서 어거스틴은 변증법과 점성학도 연구하며 학문의 폭이 넓어지면서, 점차 마니교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마니교의 일인자인 파우스투스에게서도 시원한 답을 못 얻자, 어거스틴은 결국 마니교를 떠나기로 했다.  

“위대한 회심”으로 기억되는 아우구스티누스_르네상스 시대 화가인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상`(1430~1435)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14:18)

  어거스틴은 383년 로마에 거주하던 중, 밀라노에서 수사학 선생 자리가 나서, 384년에 밀라노로 이동했는데, 이때 운명의 암브로시우스를 만났다. 암브로시우스 밀라노 감독의 설교가 어거스틴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386년 어거스틴은 로마서 13장 13~14절의 말씀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에 붙들려 회심하였고, 387년 부활절에 세례를 받았다. 마침내 어거스틴은 성(性 )어거스틴에서 성(聖)어거스틴으로 변화되었다.

  어거스틴은 391년 사제로 서품받았고, 395년(41세) 히포의 감독이 되었고, 397년부터 3년에 걸쳐 고백록을 집필했다. 이후에는 어거스틴은 도나투스 논쟁(403-412)과 펠라기우스 논쟁(412-421)을 통해 기독교 교리를 확립하고 이단의 공격을 방어했다.

  도나투스 논쟁의 주요 내용은, 도나투스파는 배도한 성직자가 베푼 세례나 성직은 효력이 없다는 주장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면, 심지어 이단자들이 베푼 세례일지라도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례는 집례자의 자격에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례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펠라기우스 논쟁의 주요 내용은, 펠라기우스파는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의와 거룩함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펠라기우스는 원죄를 부인하고, 아담의 죄는 아담에게만 국한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의 인본주의 구원관의 심각성을 교황에게 설명하고, 펠라기우스와 그의 추종자를 처벌할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200명의 감독이 41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펠라기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어거스틴은 430년 8월 28일, 7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427년 반달족(게르만족)이 북아프리카를 쳐들어왔을 때, 피난민들이 전쟁을 피해 어거스틴이 있던 히포에 쏟아져 들어왔는데, 어거스틴은 피난민을 돌보다가 걸린 열병으로 사망했다. 

  끝으로 어거스틴의 일대기를 살펴보면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어거스틴은 넓은 벽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도 벽인 것처럼, 악을 선의 결핍으로 이해했다. 인간은 부족한 부분을 욕망으로 채우려 하나,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라 조언한다. 사랑으로 채우라고 조언한다. 이웃을 향한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으로 스며든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14:18)

서동호 장로(울산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