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를 닮아가게 하기 >
“예수를 닮아가는 것”이 제자도라는 동전의 앞면이라면, “예수를 닮아가게 하는 것” 이 제자도의 뒷면이다. 자신이 예수를 닮아가는 삶을 산다면, 이 귀한 삶을 다른 사람에게 권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수함으로 다른 이들이 예수를 닮아가게 돕는 일을 피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놀라운 삶을 그의 제자들에게 부탁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19-20)
이 지상 최대의 명령 속에는 가서, 제자 삼고, 세례를 주고, 가르치라는 명령이 있는데, 이 명령들 중에 핵심은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다.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내가 예수를 따르는 자, 곧 제자가 되어서, 다른 이도 예수를 따르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즉,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평생 지속되는 일임이 다시 한번 확인된다.
이 일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누구에겐가 “가는” 일이다. 누군가를 찾지 않는다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예수(눅 19:10)를 따르는 자가 아니다. 예수를 닮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자신들이 잘 모르는 사람, 더 나아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 “가게” 된다. 이렇게 가서 우리의 진심과 삶을 통해 예수를 전하게 되면 우리는 그들 역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세례를 주게” 된다. 이렇게 세례를 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가르치신 바, 곧 하나님나라를 그들이 살아낼 수 있도록, 즉 “예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일”이 뒤따른다.
이런 면에서 복음 전도라는 말보다 복음 전수라는 말이 더욱 적합하다. 전도라는 말은 도를 전하고 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실제로 전도의 양태도 “치고 빠지는” 식이 많아서 원래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다. 전수라는 단어는 자신이 습득하지 않으면 전해줄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인간문화재가 자신의 제자를 삼는 것은 자신들의 무형문화를 전수해 주어서 그가 다음 세대에게 제대로 전달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모든 복음 전도는 복음 전수여야 한다. 단지 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다시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까지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수되지 않으면 무형문화도, 그리고 이 위대한 복음도 그 대가 끊어져 버린다.
곧 제자를 삼는다는 말 속에는 제자를 끊임없이 재생산해 내는 비전이 숨어있다. 실인즉, 지난 이천 년 동안 신실한 성도들과 교회 공동체는 이 일, 곧 복음 전수를 통해 또 다른 제자를 삼는, 제자의 재생산에 매진해 왔다.
한국 교회에서는 제자훈련이 성경 공부나 리더십 훈련과 별 다르게 여겨지지 않는다. 이것 역시 한국 교회의 제자훈련이 길을 잃게 된 이유인데, 제자훈련이 제자훈련이 되는 중요한 요소는 바로 이 재생산에 있기 때문이다. 제자훈련을 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제자 삼는 일이 없다면, 그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제자훈련이 아니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은 목회자만의 전유물일 수 없다. 예수를 닮아가는 모든 성도들의 몫이다. 재생산이 없는 제자 훈련은 제자훈련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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