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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교계일반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

  세계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대는 14세기 유럽이라고 할 수 있다. 14세기의 유럽은 2백 년에 가까운 십자군 전쟁, 프랑스와 영국 간의 백년전쟁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민생은 파탄이 날 대로 나 있었다. 또 흑사병이 창궐하여 당시 유럽인구의 1/3이 죽어 나갔다. 동시에, 봉건영주들의 고혈을 짜내는 착취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유럽 곳곳에서 봉기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종교권력과 세속권력이 대립하다 교황이 프랑스 아비뇽에 포로가 되는 사태가 발생하고, 교황이 두 사람이 등장하는 희대의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신앙이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자 온갖 미신과 사술이 유럽인들의 정신세계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14세기의 유럽사회는 그 어디서도 정의를 찾을 수 없고, 그 어떤 선한 것도, 그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는 짙은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절망과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해 종말론적 분위기가 팽배했던 시대였다.

  14세기 유럽의 그 절망의 시대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비추는 한 사람이 등장한다. 영국의 평신도 여성 수도사 「노리치의 줄리안(1321~1416)」이 그 사람이다. 그녀는 아무런 선한 것과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던 그 당시 유럽과 영국을 향하여 희망과 소망을 노래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노리치의 줄리안은 십자가 사랑이 너무나 감격스럽고, 예수님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에 동참하고 싶어 했다. 간절히 기도하던 중, 어느 날 실제로 그녀에게 육체의 고통이 찾아왔다. 이 고통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그때 한 신부가 죽음을 앞둔 줄리안에게 십자가를 보여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All shall be well” 희망의 근거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당신의 창조주이며, 당신의 구원자의 상징을 당신께 가져왔으니 이것을 보고 힘을 얻으시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그 순간부터 노리치의 줄리안의 몸은 빠른 속도로 회복이 되고 오히려 전보다 훨씬 건강한 상태가 되었다. 바로 그날 새벽 4시부터 이틀 동안 16가지의 환상을 보게 된다. 이 16개의 거룩한 환상은 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한 것이었다. 이 16개의 환상을 단문으로 적었던 책이 “Showings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들)”인데 오늘까지 그 책이 전해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되었다.   

  그 환상 중 하나가, 하나님께서 작은 개암나무 열매(헤이즐넛 열매) 하나를 줄리안의 손에 올려 주셨다. 그것은 너무 작아 후 불면 한순간 사라질 것은 같고, 열매로써 어떤 역할도 못 할 것 같은 보잘것없는 열매였다. 줄리안이 ‘이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그것은 피조물이다! 그 열매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그것을 창조했고, 내가 그것을 사랑하고, 내가 그것을 돌본다!”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때부터 노리치의 줄리안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희망을 붙들게 된다. 아무리 이 세상에 악이 가득하고 불의가 판을 치고 있다 하더라도, 개암나무의 그 작은 열매조차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신했다.  

  이 희망은 세상에 근거한 희망이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돌보시기에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다. 14세기 유럽의 절망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노리치의 줄리안은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All shall be well(모든 것이 잘될 것입니다)!”

이 말은 의례적으로 그냥 지나가는 말로 “에이 잘될 거야”라는 것이 아니다. 노리치의 줄리안은 절망의 깊이를 경험한 사람이다. 전쟁과 흑사병으로 말미암아 남편이 죽고, 자식들이 다 죽는 경험을 했다. 죽음과도 같은 절망의 한복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던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세상을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해 “모든 것이 잘될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것이 잘 된다는 것은 기복적으로 만사형통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어려움, 절망과 아픔을 느끼면서도 그것에 눌리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그 어디서도 소망을 발견할 수 없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All shall be well!”

 

김원필 목사(울산삼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