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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교계일반

"콘스탄티누스 황제"

  나는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 오늘을 잘 살아내길 원한다면 과거(역사)를 살펴보자. 역사를 살펴보면 오늘을 결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역사와 교회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역사는 하나님의 숨결이기 때문이다. 성경적 역사의식을 갖지 않으면, 자칫하면 세속적인 인본주의자가 될 수 있다. 수많은 역사의 인물 중, 오늘은 콘스탄티누스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313년 2월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조각상 사진_https://m.blog.naver.com/bluett2/221967773579

  콘스탄티누스의 두 가지를 기억하자.  
  첫째,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기독교를 공인했다.   
  둘째, 밀비우스 전투에서 십자가 문양을 달고 승리했다. 
  그에 대한 실마리를 전쟁에서 풀어가 보자. 그렇다면 그는 십자가 문양을 달고, 언제 누구와 왜 싸웠을까? 
  로마는 군인황제시대(235-284)를 거치면서, 26명의 황제가 난립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와 같았다. 이러한 혼란을 정리하고 질서를 확립한 인물이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였다. 그는 로마를 동/서로 나누어, 동방 황제와 서방 황제를 세우고, 그 황제들 밑에 각각 부황제를 두는 체계를 마련했다. 즉 로마 전체를 4명이 통치하는 형태였다.
  질서를 확립한 디오클레티아누스(동방 황제)는 305년 안정적인 정권 이양을 위해 스스로 동방 황제 직위를 내려놓았고, 서방 황제인 막시미아누스도 동반 퇴진시켰다. 
  이때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는 서방 부황제였다가 서방 황제가 되었다. 그런데 콘스탄티우스는 황제가 된 지 1년 만인 306년 갑자기 사망하게 되자, 군사 지휘 능력이 탁월했던 콘스탄티누스를 부황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서방 황제로 추대했다. 이를 지켜본 동방 황제(갈레리우스)는 크게 분노하였다. 그는 부황제였던 세베루스를 서방 황제로 임명하고, 콘스탄티누스를 서방 부황제로 내려 안쳤다. 어찌 보면 군인의 추대로 황제가 되었다가 부황제로 쫓겨난 것은, 모욕이고 창피한 일일 수 있었으나, 콘스탄티누스는 이를 받아들이고, 훗날을 도모하며 절치부심 노력했다. 
  한편, 이러한 절차에 반발한 인물들이 또 있었다. 그들은 서방의 전임 황제 막시미아누스와 그의 아들 막센티우스였다. 그들은 자칭 서방 황제라 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최후의 일전이 벌어졌는데, 그것이 312년 10월 28일 밀비우스 전투였다. 당시 콘스탄티누스의 병력은 4만 명 정도였고, 막센티우스의 병력은 8만~10만 명 이상이었다. 전투 전날, 콘스탄티누스는 ‘이 기호(십자가)로 너는 승리하리라’ 환상을 통해 모든 방패와 깃발에 십자가 문양을 표시했고, 밀비우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반란을 일으켰던 막센티우스도 전사했다. 

밀비우스 전투의 승리로 콘스탄티누스는 부황제에서 황제로 정식 임명된다.(밀비우스 다리 전투 프레스코화_줄리오 로마노 작_나무위키)

  밀비우스 전투 이후, 원로원의 승인을 거쳐, 콘스탄티누스는 부황제에서 서방 황제로 정식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콘스탄티누스는 당시 동방 황제(리키니우스)와 사이좋게 밀라노칙령(313년 2월)을 발표했다. 이 밀라노칙령에 따라 로마는 기독교를 공인하고, 기독교 박해를 중지시키고, 빼앗은 교회의 재산을 돌려주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전쟁 승리, 황제 임명에 이은 밀라노칙령 발표까지는 기독교 역사적으로 커다란 사건이자 이정표였다.
  콘스탄티누스가 서방 황제가 되었지만, 권력은 나눌 수 없는 속성을 가졌듯이, 당시 동방 황제인 리키니우스와는 315~324년 사이 권력투쟁은 계속되었다. 324년 에디르네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가 리키니우스 대군에 승리함으로써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로 등극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가 312년 밀비우스 전투 승리 후 기독교를 공인(313년)했던 것처럼, 324년 에디르네 전투 승리 후에는 니케아 공의회(325년)를 개최하여, 기독교의 교세 확장과 교리 확립에 큰 역할을 했다.
  니케아 공의회에는 318명의 주교를 포함하여 수행원 등 1,500명 이상 참석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당시 여러 논쟁으로 분열의 양상을 보였던 교회의 연합과 일치가 국가의 안정에도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니케아 공의회의 주요 안건은 첫째, 로마제국의 기독교 대박해(250-310) 때 변절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중요 이슈였다(도나투스 논쟁). 둘째, 기독교가 313년 기독교 공인 이후, 교세의 확장으로 인한 교구 및 행정 관련 이슈도 정리하고자 했다. 셋째, 아리우스 논쟁에 대해, 아리우스의 교리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니케아 신경을 채택했다.
 예수님은 참 신이시요 참 인간이시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붙잡았던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었다. 그런데 기독교가 헬라 세계로 확장되면서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두 학파가 있었는데, 유대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안디옥 학파와 헬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였다. 안디옥 학파는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했고,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했다.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 주교였지만 그는 안디옥 출신이었다.
  4세기 초 알렉산드리아 주교였던 아리우스는, 하나님의 신성이 넘쳐서, 예수가 탄생했다고 보았다. 즉 예수를 서열이 가장 높은 피조물로 이해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의 주장에 대하여, 아타나시우스(알렉산드리아 주교)는 반론을 펼쳤다. 그는 예수가 피조물이라면, 피조물이 다른 피조물을 구원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의 주장이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한편, 우리가 가장 흔하게 쉽게 오해할 수 있는 삼위일체는, 내가 집에서는 아버지이고, 회사에서는 부장이고, 교회에서는 집사라는 역할론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바른 설명이 아니다. 이는 내가 회사에 있는 동안에 교회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오늘날에도 끝이 다른 이단의 지뢰는 어디든 깔려 있다. 학생들에게는 과학주의에, 청년들에게는 개인주의와 인본주의에, 어른들에게는 물질주의와 성장주의 사고방식에 깊이 침투되어 있다. 
  18세기의 계몽주의가 인간의 이성을 깨웠지만, 그 시기에 발현한 신학과 철학사상은 인간의 이성을 강조한 인본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인본주의 안에는 하나님이 계실 자리가 없다. 우리는 지식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이긴 경기를 녹화로 보는 것과 같다. 그럴 수 있는 것은 내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성경 안에 있기 때문이다. 결국 성경이다. 말씀이 답이다.


서동호 장로(울산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