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1~2)
바벨탑 사건 이후, 흩어진 민족 중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그에게 복(福)을 약속하셨다. 복은 누구나 받기 원하고, 그것을 누리기를 소망한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복에 관심이 지대했고, 그 복의 실체에 관한 해석들도 다양했다. 크게는 세 부류의 해석으로 나눠진다.
1. 유대교 랍비의 해석
유대교 랍비 신학자들은 아브라함의 복을 철저하게 ‘선민사상’에 근거하여 해석했다. 곧 육신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만이 누릴 수 있는 복으로서 선천적이고 혈통적인 복으로 이해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파 율법학자들, 사도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식음을 전폐하면서까지 복음전파를 방해했던 골수 유대인들, 그리고 오늘날 정통 유대인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유대 혈통만을 따진 이 해석은 너무나 궁색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의 반경이 매우 협소하기 때문이다.
2. 구약성경만의 해석
구약성경을 분류할 때, ‘육경’이라는 말을 사용하곤 한다. 이것은 모세오경에다가 여호수아를 합한 것이다. 육경을 묶은 이유는 창세기에서 약속한 복이 여호수아 때에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약속과 성취’의 관점에서 육경이 된다. 대표적으로 독일 구약성경학자 게르하르트 폰 라트( Gerhard von Rad)가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아브라함의 복(福)을 ‘후손과 땅’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영원히 지키고 유지할 수 있었던가? 아니었다. 땅은 열국에게 번번이 점령당했고, 후손들은 포로로 잡혀갔다. 그 일부가 다시 돌아오기는 했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흐지부지해졌다. 실제로 구약성경을 해석할 때, 후손과 땅을 ‘shadow & mirror의 이미지’ 곧 실체에 대한 그림자와 거울에 비친 형상으로 이해함으로 해석의 포괄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해석은 극히 문자적이고, 구약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3. 사도들의 해석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전적으로 해석했던 대표적인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을 목격한 후, 성령을 체험했던 사도들이었다. 마태 사도는 복의 실체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했다(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계보라.
그래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아브라함의 후손들, 그리고 다윗 왕조의 왕손들은 오직 한 분만을 지목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셨다. 곧 아브라함의 후손들(다윗의 후손들)은 실체이신 예수님의 그림자일 뿐이었다. 게다가 사도 요한은 아브라함의 후손에 관하여 새롭게 해석했다(요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사도 요한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육신의 혈통 넘어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고 새롭게 정의했다.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의 해석은 더욱더 파격적이었다. 요한이 언급한 ‘하나님께로 난 자들’을 바울은 ‘교회’로 이해했다(엡 2:19~22):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사도 바울이 주장한 ‘복의 실체’란 예수님을 머리로 삼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뤄가는 ‘교회’였다. 따라서 교회는 건물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궁 안에서 예수님에 의해 잉태되고, 성령님에 의해 자라는 ‘예수의 몸(body)’을 의미했다. 그래서 바울은 순교하기까지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일에 그의 전 생애를 바쳤다.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약 220년경, 당시 기독교 박해가 매우 심했을 때, 교회를 끝까지 지켰던 초대 교부 키프리안은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 교회는 어머니와 같다. 교회를 어머니로 받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을 수 없다.”라고 교회를 강조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도 「기독교 강요」 제 4권 1장 1절에서 교회를 어머니에 비유하며, 교회가 구원과 양육과 연합의 수단이 됨을 거듭 강조했다: “하나님은 교회의 가슴 속으로 그의 아들들을 불러 모으시고, 어머니와 같은 교회의 지도를 받아 그의 아들들이 양육되고, 성장되어 신앙의 목표에 도달하게 되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들에게 교회는 어머니와 같다고 하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복은 단지 ‘후손과 땅’ 정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몸인 교회’이다. 이것이 사도들의 공통된 해석이었다.
아브라함의 복이 온 민족에게 ‘복의 시작’이었더라면, 울산 땅에 ‘복의 시작’은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 조선의 경상좌도 병마절도사(현, 육군사령부)가 울산 병영에 500년을 지속해오고 있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군대가 해산되면서 특수 군사지역도 함께 폐쇄되었다. 그 이듬해(1895.1.8) 바로 이곳에 복의 실체인 예수와 그 몸인 교회가 울산에 처음 세워졌다.
그 교회가 병영교회이다. 이 일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개입했다. 왜냐하면, 조선의 국방을 책임졌던 자리에 하나님은 영적 세계를 지배하는 ‘하나님의 군대’가 서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 당시 군대 주둔지였던 병영은 사창가와 술집과 점집으로 가득했다. 즉 영적으로 매우 어둡고, 극도로 타락한 곳이었다. 하나님은 이곳에 복이 시작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이희대와 그의 가족의 헌신으로 교회터와 성도를 준비하셨고, 그 먼 호주로부터 사명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선교사님들을 파송하셔서 예수와 그 몸인 병영교회를 세웠다.
그 후 병영교회는 병영지역에 복의 통로가 되어 빛으로 어둠을 몰아내었고, 말씀으로 영혼들을 진리 안으로 이끌었으며, 그리스도의 치유와 회복의 능력으로 영생의 복을 나눠주었다. 그 복은 병영성을 넘어서 강정-지당-호계로 흘러 들어가 곳곳마다 예수와 그 몸인 교회들을 세워갔다. 그 후 일제강점기, 3.1운동과 해방, 그리고 6.25전쟁을 거치면서 복의 실체인 예수 교회는 울산 전역으로 복의 줄기가 되어 곳곳마다 뻗어갔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약 650여 개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들이 세워져 울산 땅 곳곳마다 두루 편만한 복이 되고 있다.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복을 우리 울산 땅에도 아낌없이 주시고자 계획하셨다. 병영교회가 ‘울산에 시작된 복’인 것이 참으로 크나큰 영광이오, 중차대한 책임으로 다가온다. 복은 흘러야 복이다. 소망하기는, 지금까지 울산이 받아 누렸던 복(福)이 북한과 열방을 향하여 계속해서 흘러가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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