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인간)과 타지(세계)에 관해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싶다면 단연 독서와 여행이 최고다. 독서는 마음으로 하는 여행이며,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라는 말이 있다. 되새길수록 정확한 말이다. 독서는 물리적 세상에서 겪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구체적인 삶을 이해하게 해 준다. 육하원칙으로 작성한 언론 취재 기사만으로는 인간의 삶에 깊이 다가가기 어렵다.
예를 들어보자. 예전에 ‘아프가니스탄’이라고 하면 이슬람 원리주의와 탈레반, 여성 탄압과 난민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전부였다. 그 땅의 역사와 인종, 문화에 관해 문외한이었던 내가 그곳 백성을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된 건 세 권의 소설책 때문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미국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가 쓴 <연을 좇는 아이>, <천 개의 찬란한 태양>, <바다의 기도>가 그것이다. 세 작품에는 소련의 지배와 내전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넘어 아프가니스탄 땅과 백성이 겪어낸 고통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객관적 사건 취재를 통한 단편적 이해가 아니라, 개인의 주관적 삶을 통한 구체적인 이해는 그 땅에 대한 편견을 깨끗하게 씻어주었다.
독서 후 언젠가 아프가니스탄 땅도 밟아보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소설 속 인물들의 무대로 직접 찾아가서 그 땅의 향기를 맡는 여행은 독서를 통한 이해를 더 깊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 그대로다. 여행을 통해 현장을 직접 보고 편견을 깨끗하게 지울 수 있었던 대표적인 도시가 ‘티라나’였다.
티라나는 발칸반도 서쪽에 위치한 알바니아의 수도로, 아드리아해와 가까운 도시다. 여름에 방문했는데 지중해성 기후인데도 꽤 더웠다. 학창시절 역사 시간에 배운 대로라면 알바니아는 과거 소비에트연합 하에서 억압받는 나라였고 별 볼 일 없는 발칸반도의 변방이었다. 솔직히 알바니아로 향하면서도 큰 기대는 없었다. 1990년대에 독립해 경제 성장에 애쓰는 나라, 회색빛 도시 풍경, 시민들의 어두운 표정 등을 떠올렸다. ‘동유럽의 가난한 나라’라는 뿌리 깊은 인식은 지금 돌아보면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없다는 태도와 흡사했다.
하지만 직접 본 티라나의 첫인상은 초록색 산들에 둘러싸인 보석 같았다. 도시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 다지트 산에 올랐을 때 편견은 깨끗하게 사라지고 감탄이 흘러나왔다. 거대한 손에 감싸인 듯한 도시의 외양은 무척 평안해 보였다. 순간, 언젠가 기독교 잡지 표지 사진에서 거친 노동자의 양손에 감싸인 보석을 보고 감동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마치 우리의 초라한 자아 속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 같아 먹먹했었다. 내가 수십 년간 알바니아에 대해 지닌 편견은 거친 양손뿐이었다는 자각에 부끄러웠다. 눈과 내면이 서열화의 가치로 오염되어 진정한 가치를 보지 못한 탓일 터였다.
티라나의 시민들은 과하게 친절했고 도시 외관도 밝았다. 특히 젊은이들은 호기심이 많았다. 어디서 왔는지 묻더니 초면에 K팝에 관해 열렬한 관심을 나타내는가 하면, 꼭 한 번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며 엄지 척을 보여주기도 했다. 도시 중앙에는 여름 축제도 열리고 있었는데 질서정연함 속에서 시민들의 밝은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미술관과 극장이 모여 있는 ‘아트 디스트릭트’는 다른 도시가 흉내 낼 수 없는 예술미로 가득했다. 군사박물관을 둘러볼 때는 오랜 억압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환하게 웃는 알바니아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 도시 풍경이 서유럽처럼 화려하지 않아서 내겐 오히려 개별적인 독특함으로 다가왔다. 현지 가이드는 ‘동유럽의 스위스’로 불린다고 설명했지만, 굳이 알바니아가 스위스를 닮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알바니아는 그 자체로 이미 독특한 개성과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었으니까.
아는 만큼 보게 되는 건 진리인 듯했다. 그래봤자 며칠 묵으며 티라나의 겉모습만 훑고 지나온 것에 불과했다. 돌아오면서 알바니아인들은 한국과 한국인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K팝 외에 한국인에 관해 과연 무엇을 알고 있을까 싶었다. 한국의 인류학적 시원과 역사적 상처, 한국인의 기질과 태도, 사회경제적 당면 과제와 미래 전망 등은 까맣게 모른 채 눈에 드러난 K팝에만 열광하고 있을 확률이 높아 보였다. 내가 그들을 모르듯.
개인과 개인, 국가와 국가 간 서로를 깊이 알아가는 길은 지속적인 교류와 서로를 배우려는 겸손한 태도에서 시작될 테다. 일상에서도 내가 상대방을 직접 만나 깊은 대화도 나눠보지도 않은 채 막연한 편견으로 판단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내 편견(혹은 직관)을 굳게 믿으며 상대방을 알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 때가 많다. 사회는 물론 수십 년을 함께 해온 신앙공동체인 교회에서조차도 그렇다.
여행은 일상을 떠나 낯섦을 경험하는 일이고, 그 낯섦 속에서 아주 잠깐이라도 익숙하지 않은 타인의 삶을 공유할 수 있다. 우리의 부족한 안목으로 타인과 타지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함부로 판단하는 오류는 줄일 수 있을 테다. 그러니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여행은 그 어디든 떠나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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