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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신앙에세이

바울 사도가 갈망한 땅, 로마

    지난 6월, 교회사 편찬을 위한 선행작업으로 울산지역 교회사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울산지역 교회사 안에서 우리 교회 설립의 의미를 찾아보려는 목적이었다. 여러 자료를 참고하며 울산지역 교회사를 요약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큰 은혜를 받았다. 미국북장로교와 호주빅토리아장로교 선교사들을 통해 부산을 거쳐 울산에 복음의 빛이 스며드는 과정은 한 편의 감동적인 대하 드라마였다. 일신의 안녕을 뒤로하고 전 생애를 복음에 바친 선교사들의 희생에 먹먹했다. 사역 중에 병사(病死)하거나 자녀를 잃은 선교사들은 물론, 천신만고 끝에 선교지에 도착하자마자 폐렴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선교사도 있었다. 그분들은 하나같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듯 선교의 큰 밑거름이 돼주었다.

  1895년 중구 병영교회를 필두로 1899년 두동면 은편교회 등 울산지역 교회가 설립되는 과정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가끔 동아리 학생들을 데리고 병영성과 외솔기념관을 둘러보면서도 병영교회는 스쳐 지나갔었다. 또, 매년 벚꽃이 필 때면 남편과 함께 두동면 은편리와 만화리 쪽으로 드라이브 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은편교회 푯말도 무심히 보아왔다. 복음의 산 역사물을 그냥 지나치다니, 몰라서 보지 못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즈음, 미국 LA에 거주하는 박경숙 작가로부터 그녀의 저서 『약방집 예배당』을 선물로 받았다. 1894년 김해교회를 설립한 배성두 장로(LA 한인교회 배기호 장로의 증조부) 일가의 이야기를 다룬 실화소설이었다. 울산지역 교회사를 정리하며 이름을 익힌 선교사들이 실제 등장하는 소설을 읽으며 한 번 더 짙은 감동에 빠져들었다. 한국적 사도행전을 읽는 것 같았다. 울산지역 교회사와 『약방집 예배당』을 동시에 만난 건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스쳤다. 마침 지난 6월 우리 교회 성도들이 다 함께 묵상했던 성경 본문도 사도행전이어서 이래저래 선교에 관해 깊이 묵상하는 한 달을 보냈다.

  성령의 인도로 말미암아 바울 사도로부터 시작된 해외 선교가 지구를 돌아 마침내 180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 깃든 역사도 감사했고, 구한말 외증조할아버지를 통해 친정 가문에 복음의 빛이 스며든 은혜도 감사했다. 바울 사도로부터 시작해 선교사들과 선조들을 거쳐 나에게, 그리고 아들에게까지 흐르는 복음은 내 생애 가장 귀한 선물일 테다. 바울 사도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염원할 때, 대서양과 태평양을 넘어 극동아시아까지 뻗어간 복음을 상상해 보았을지 가끔 궁금해지곤 한다. 

사도 바울 Apostle Paul 렘브란트 Rembrandt 1635년, 바로크 시절,  캔버스에 유채, 135 x 111 cm(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Austria)

  이십 년 전 로마 다빈치 공항에 내렸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인물은 역시 바울 사도였다. 로마 시대에 역사 속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도, 죄인의 신분으로 바울 사도가 로마로 호송된 것도 하나님의 섭리였다. 당시 세계의 중심 로마에서 바울 사도가 보고자 했던 건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 된 세상이었고, 진행형인 그의 꿈은 후대의 선교사들을 통해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로마는 놀라운 고대유적과 르네상스 예술품들로 가득했다. 판테온을 비롯해 필라티노 언덕, 전차 경기장이었던 나보나 광장,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햅번이 동전을 던진 트레비 분수, 순교자들이 피 흘리며 죽어간 경기장 콜로세움 등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르네상스 회화와 조각, 건축의 절대미 앞에서 관광객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문화·역사 박물관 같았다. 

  하지만 수많은 유적을 뒤로하고 내가 가장 먼저 보고 싶었던 곳은 바울 사도의 처형 장소였다. 라우렌티나 역에서 내려 바울 사도의 처형 터인 ‘세분수교회’로 가는 길은 다른 유적에 비해 인적이 드물었다. 조용한 분위기가 순례객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차가운 지하 감옥에서 디모데에게 겉옷을 가져다주길 서신으로 부탁했던 바울 사도의 신고(辛苦)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만으로 먹먹했다. 지하 감옥에서 처형장까지의 거리는 백여 미터 정도였다. 그 길을 걸어가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천신만고 끝에 오게 된 로마에서 그가 받은 건 고난과 참수형이었다.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_ 호주출신으로 조선에 뿌려진 두번째 “한알의 밀알”

  지난 6월, 사도행전을 묵상하다가 바울 사도의 얼굴 위로 호주 데이비스 선교사 얼굴이 오버랩됐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1889년 가을 한국에 도착해 조선말 기초를 배운 후, 서울에서부터 걸어서 천신만고 끝에 선교지 부산에 도착했지만 바로 다음 날 폐렴으로 병사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너무나 허망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호주 내에서 한국선교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었고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에게서 바울 사도의 그림자를 본다. 나는 도시 로마에서 화려한 문화 유적이 아닌 바울 사도의 꿈을 보았다. 로마는 복음의 꿈을 품은 곳이어서 아름다웠다. 처형장까지 묵묵히 걸어갔던 바울 사도의 길은 세계의 모든 길로 이어져 뭇 성도들의 심장에까지 닿아 있지 않은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한 그를 생각하면,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 속 한 구절이 떠오르곤 한다. 

 “만약 누군가 수백만 개의 별에 딱 한 송이밖에 없는 꽃을 사랑한다면, 그는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