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의 뉘앙스는 참 신비하다. 그중 하나가 ‘내일’이라는 단어다. ‘내일’을 붙여서 읽으면, 오늘 다음에 오는 날(tomorrow 또는 future)의 의미가 되고, 내일을 떼어서 읽으면 전혀 다른 의미로써 나의 일(my job)이 된다. 그런데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내일’과 ‘내 일’이 아주 밀접하게 연결된다
“‘내 일’이 없는, ‘내일’은 없다!” 김난도 교수가 쓴 「내:일」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는 정말 애착을 두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내 일’이 있는가?를 묻는다. 그런 사람에게 내일 곧 미래가 주어진다고 한다. 참 일리가 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루소는 “사람은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존재하기 위해 태어나고, 또 한 번은 일하기 위해 태어난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사명을 발견하기까지는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고유한 ‘내 일’을 발견할 때, 비로소 ‘내일’이라는 미래가 주어진다. 그가 언급했던 ‘내 일’은 직업을 넘어 ‘사명’을 의미했다.
중세에 있었던 재밌는 일화가 있다. 중세 시대에 어느 영주의 집에 큰 정원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 그 정원의 정원사가 꼭두새벽부터 나무로 만들어진 화분을 열심히 조각하고 있었다. 산책길에서 그 모습을 본 영주는 그 정원사에게 “그렇게 일해도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새벽부터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가?” 하며 물었다. 그때 정원사가 대답하기를 “저는 이 정원을 사랑하고, 돈과 무관하게 내 일을 사랑합니다.” 영주는 그의 말에 감동되어 그에게 미술 공부를 시켜주었다. 그 후, 그 정원사는 놀라운 내일을 맞이했다. 그가 바로 16세기 이탈리아의 유명한 조각가요, 화가였던 미켈란젤로가 되었다.
가장 멋있는 사람은 오늘-내일-모레, 곧 내일만을 자꾸 맞이하는 사람, 시간만 보내는 사람이 아니라, 내 일 곧 하나님이 맡겨주신 고유한 사명을 찾아서 그 일을 잘 감당하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고 가장 위대한 한 사람을 꼽으셨다(마 11:11):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바로 세례 요한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사명을 명확하게 이해했고, 그 사명을 정말 성실하게 수행했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람은 사명 이해와 사명 수행이 분명하다. 그러할 때, 먼저 예수님께 인정받고, 그다음은 세상으로부터 영원히 존경이 이어진다.
20세기 복음 전도자 중에서 빌리 그래함 목사님만큼, 위대한 성과를 이뤘고, 존경을 받는 분은 없을 것이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이겨내기 힘들었던 세 가지 유혹에 관하여 언급한 적이 있었다. 첫 번째 유혹은 상원의원에 출마하라는 공화당의 제안을 받았을 때였고, 두 번째 유혹은 공화당의 부통령으로 출마하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였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강력했던 세 번째 유혹은 미국의 한 재벌이 모든 비용을 댈 테니 세계에서 가장 이상적인 환경을 가진 미션스쿨을 세워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 세 가지 제안을 그럴싸한 타협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그는 고심 끝에 세 가지 다 거절했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저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이지, 정치하는 정치인이나 사업가나, 교육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자신의 사명 이해와 초심을 지키며 그 사명을 끝까지 감당했을 때, 인정과 존경은 영원히 이어진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로고스)’ 곧 진리와 생명의 말씀으로 소개한다(요 1:1, 14). 반면, 세례 요한은 ‘소리’에 불과했다(요 1:23). 정확하게는 ‘그 말씀을 위한 목소리’였다. 여기엔 역할 분담이 아주 뚜렷하다. 전자는 목적, 후자는 수단이다. 전자는 본질, 후자는 본질을 위한 도구이다. 이처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라이벌이 아니라, 예수님만을 위한 도구임을 분명히 자각했다(요 1:27).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세례 요한이 이렇게 했던 깊은 이유가 있다. 자칫하다간, 목소리가 너무 커지고 세다 보면, 말씀이 그 소리에 파묻혀버릴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말씀이 잘 전해지도록 목소리로만 쓰임 받기를 원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은 자신을 혼례식 신랑 친구에 비유한다. 유대 혼인 잔치에서 신랑 친구를 쇼쉬벤(shoshiben)이라 부른다. 쇼쉬벤은 신랑과 신부 사이에서 혼례식 준비도 하고, 초청장도 내주며, 혼인 잔치를 주재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가 해야 하는 가장 특별한 임무는 신부 방을 철저히 사수하여 가짜 신랑이 침입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어둠을 뚫고 도착한 신랑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은 다음, 그 신랑이 진짜 신랑인지 가짜인지를 분별해 주는 역할을 한다. 쇼쉬벤이 진짜 신랑이라고 인정할 때에만 비로소 신부는 신방 문을 열어 신랑을 맞이한다. 그래서 쇼쉬벤은 신랑을 척 알아볼 수 있는, 신랑과 절친(Best Friend)만이 할 수 있고, 혼례식 날 신랑의 목소리를 제일 먼저 듣고, 기뻐하면서 신랑 맞이를 한다. 사랑하는 신랑과 신부가 서로 만나게 되면, 쇼시벤의 임무는 다하였으므로 그것으로 너무 기뻐하고 행복해하면서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난다(요 3:29절).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이처럼 세례 요한 자신은 쇼쉬벤에 불과하며, 신랑이신 예수님만을 위한 존재임을 거듭 밝히면서 유명한 한마디를 덧붙이고 사라진다
(요3:30절).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유럽 서방교회에서 예수님의 탄생일인 성탄절을 12월 25일로 정했다. 그 이유는 동지를 지난 시점, 그때부터는 낮이 점점 길어진다. 곧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사명을 밝히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한편, 세례요한의 축일은 6월 24일로 지킨다. 그 이유는 하지를 지나자, 그때부터는 밤이 점점 길어진다. 곧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다 수행했다면, 이제 역사의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진다는 의미이다. 참 멋있지 않은가!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세례 요한을 극찬하셨다(마 11:11).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사명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성실한 사명 수행이 예수님의 극찬을 이끈다.
제자도와 영성 전문가였던 달리스 윌라드 목사님은 다양한 신앙의 문제로 갈등하는 이들이 편지나 이메일로 문의할 때마다 짧은 단문으로 답했다: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이렇게 다짐하세요. ‘오늘은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자!’라고 말입니다.”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가? 바로 ‘사명’이다. 그 사명은 말씀을 위한 소리의 사명이다. 2,000년 전에 세례 요한이 ‘초림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다라면, 지금 우리는 ‘재림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중이다. “다시 오마” 약속하셨던 우리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날 그 시까지 우리는 세상 곳곳으로 말씀을 전파하는 그분의 목소리 역할을 성실히 감당해야 한다. 또한, 말씀이 순수하고 강렬하게 전해지도록, 말씀만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우리는 겸손한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목소리의 사명을 다 감당한 후에는 소리 소문없이 역사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져 오직 예수님만 오롯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님을 위한 목소리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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