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계/교계일반

아빠는 왜 "외국인들을 사랑해요?"

  모든 사역의 프로그램은 “왜(why?)”라는 질문에서 나와야 한다.

나의 세 아이들은 아빠가 저녁에 집에 있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 그러나 아빠의 현실은 자녀들의 기대와는 많이 다르다. 기도회, 제자훈련, 심방 등으로 아이들이 잠들고 나서 들어왔다 또 아이들이 깨기도 전에 새벽에 교회를 다녀오기 때문에 막내는 아빠가 밖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집에 들어오는 줄 안다.  그래도 일주일에 하루, 매주 화요일 저녁에는 자녀들과 함께하는 ‘패밀리 타임’을 가진다. 아이들은 아빠와 함께하는 화요일 저녁 패밀리 타임만을 기다리고, 혹시라도 그날 다른 일이 생기면 “아빠~ 이번 주에 패밀리 타임 못 했잖아요. 대신 오늘이나 내일 꼭 해요. 약속 지켜요!”라고 조른다.

이집트에서 난민과 이주민으로 사셨던 예수님

  우리 교회 이주민 멤버들을 심방하고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연구하고 글을 쓰는 아빠를 보면서 어느 저녁에 첫째 딸이 이렇게 묻는다. 

  “아빠 뭐해요?” 

  “응, 어떻게 하면 우리 도시 안에 있는 외국인들을 잘 섬기고 복음을 전할 수 있을지 글을 쓰는 중이야.” 

  “아빠는 외국인들을 사랑해요?” 

  “응, 아주 많이.” 

  “아빠는 왜 외국인들을 사랑해요?” 

  “음... 그건 예수님이 그분들을 사랑하시거든. 그리고 예수님도 외국인이셨거든.”

   “응~ 그렇구나.”

    다른 교회에서 설교를 하거나, 선교 관련 포럼, 세미나 등에서 발표를 하고나면 이주민 선교에 관심을 갖는 사역자분들과 성도님들이 질문한다.

  “이주민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요?”

  “이주민들을 위한 제자훈련 프로그램이나 교재는 무엇이 있나요?” 

  “시티센터교회에서는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을 어떻게 섬겨요?”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는 다문화 가정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어떤 전도 프로그램들이 있어요?”

  그러면 나는 보통 우리 교회의 사례를 소개한다. 그런데 정말 이 사역에 깊은 고민과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면 이렇게 말씀드린다. 교회 상황에서 맞는 방식을 고민하셔야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엇을(what)’이나 ‘어떻게(how)’에 대한 질문보다는 ‘왜(why)’에 대한 질문이 더 옳다. 왜냐하면 어떤 동기와 이유로 하느냐에 따라 그 성격과 질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모든 사역 프로그램은 ‘왜’라는 질문에서부터 나와야 한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 예수님도 이주민이시며, 나그네시다.

  우리는 왜 이주민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실천해야 하는가? 이주민 선교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 이주민이셨기 때문이며, 예수님이 그분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태어나셨을 때 헤롯의 영아 학살을 피해 부모님을 따라 이집트로 피난을 가셔야 했다. 다시 말해 이주민이자 난민 가정의 자녀로 사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셨던 그분이 아브라함처럼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 편안하고 안락했던 하늘 본향을 떠나 이 땅에 오셨고, 낯선 기후와 환경에 적응하셔야 했고 팔레스타인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셔야 했다. 예수님은 지리적으로 이주민이셨고, 영적, 신분적으로도 이주민과 나그네가 되셔야 했다.

  예수님은 심지어 자기 땅에서도 외국인과 나그네로 사셨다. 이 땅에서는 자신의 집이라고 할 곳도 없으셨기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라고 하셨다. 자기 땅에 왔지만 자기 백성들로부터 배척 당하셨고(요 1:11), 같은 민족이었던 유대인들로부터도 ‘사마리아인’이라는 외국인이자 외부인 취급을 당하셨다(요 8:28). 심지어 그분은 십자가에서 아버지로부터 외면 당하셨고, 아버지의 집에서 추방 당하셔야 했다. 그분은 집 없고 머리 둘 곳 없는 나그네들과 어디에도 소속될 곳 없는 이들, 고향과 조국을 떠나야 하는 이주민과 외국인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시고 공감하신다.

  이주민의 아픔과 애환을 누구보다 더 이해하시는 그분이 이주민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계셨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은 유대 땅에 함께 살고 있었던, 수로보니게 여인, 로마 군대의 백부장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셨고, 이방인의 땅 두로와 시돈, 데가볼리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복된 소식을 전해주셨다. 유대인들이 상종조차 하지 않았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셨고, 유대인들에게 ‘좋은 이웃’의 예와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인’의 모범을 가르쳐주실 때 충격적이게도 사마리아인을 제시하셨다. 예수님은 당시 사회에서 소외되고 외면 당하던 이들, 소위 아웃사이더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다.

   이집트에서 난민과 이주민으로 사셨던 예수님,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마 25:35)라고까지 말씀하셨다. 자신을 나그네 및 외국인과 동일시 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 곁에 있는 나그네와 외국인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곧 그분 자신에게 한 것이며, 그들에게 하지 않은 것은 자신에게 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까지 말씀하셨다(마 25:40,45). 이렇게까지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우리가 우리 곁에 들어온 이주민들과 나그네들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들을 단순히 선교와 전도의 대상으로만 삼으며 일방적이고 비인간적으로(dehumanizing) 관계 맺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예수님을 대하듯 그분들에게 예수님의 환대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한국인과 이주민, 우리 모두는 하늘에 속한 천국 시민권자들이며, 복음 안에서 우리는 동등한 하나님의 권속이며 가족이다.”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우리는 모두 하늘 본향을 떠난 영적 이주민이다. 우리의 비자 형태나 국적, 시민권에서는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한국인과 이주민은 모두 하늘에 속한 천국 시민권자들이며 복음 안에서 우리는 동등한 하나님의 권속이며 가족이다. 오늘도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이주민 성도님들, 우리 도시 안에서 만나는 모든 한국인과 외국인 이웃들을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아무런 조건(심지어는 ‘교회 등록’이라는 조건조차) 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작은 예수들이 우리 도시 안에 가득하길 간절히 기도한다.

시티센터교회 신치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