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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발행인칼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몇 년 전 고신교단의 학원이사로 섬긴 적이 있었다. 사실 나는 학원이사로 섬길 기회가 오리라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나를 멀리서 눈여겨보며 평소 아껴주시던 여러 목사님들, 장로님들 도움으로 별 어려움 없이 학원이사로 선임되어 고신대학과 신대원, 고신의대, 복음병원을 두루 관장하는 학원이사로 교단을 위해 소신껏 섬길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이사가 되고 나서 이사장 선거가 있었다. 선거 며칠 전에 나를 아끼던 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모 장로님을 이사장으로 세워야 하는데 목사님이 꼭 그분을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화를 받고는 참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나를 응원하고 밀어 줄때는 그런 계산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나는 좌고우면 하지 않고 고신교단과 학원을 위해서 바른 길로 가겠노라고 다짐을 하고는 그의 청을 들어줄 수 없다고 하니 상당히 좋지 않는 반응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분에게 나를 개 줄로 목에 걸어놓고 주인이 마음대로 하듯이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까지 말했으니 더욱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처음 해 보는 이사직이 이런 타락한 일인지 몰랐고 당장에라도 집어 치우고 싶었지만 주위의 지인들이 그런 것 들을 잘 이겨 나가야 한다고 하기에 참고 견디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 요직에 있던 분이 저지른 불법 부당한 일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 했더니 나를 아는 분에게서 전화가 와서 “목사님!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하면 바위보다는 계란이 쉽게 깨어집니다. 문제점들이 보여도 참고 그냥 넘어가야지 그런 일들을 자꾸 문제 삼으면 당사자만 힘들어집니다” 고 충고 아닌 충고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 나는 “성경을 모르시나요? 계란으로도 바위가 깨어진 역사를요.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사건이 바로 계란으로 바위를 깬 역사지요” 라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도 사실 모난 돌로서의 삶이었지 않은가? 그냥 현실과 타협하며 둥글둥글하게 사시지 않으시고 일부러 모난 돌이 되어 정을 맞으신 일이 한 둘인가? 안식일이 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안식일에 어떻게 하는가를 살피고 있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의 심기를 건드려 모난 돌이 되셨다. 그리고는 정을 맞아 깨어져 나가셨다. 자신은 한없이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일부러 그렇게 사신 이유는 잘못된 그들의 삶을 깨우치기 위한 예수님의 마음이었던 것이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회개치 않는 뻔뻔한 사람들을 향하여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리켜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고 하더냐 하시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지 말라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하시고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고 그는 스스로 모난 돌이 되어 살다가 장렬하게 순교를 당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일컬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이보다 더 큰 자가 없다고 높이 평가해 주셨다. 


  나는 어린 시절 우리 어머니로부터 수없이 듣고 자란 말씀이 “이 놈아! 모난 삶을 살면 정을 맞으니 둥글둥글 하게 살아라”였다. 그래서 할 말이 있어도 참고 불의와 부정을 보고도 모른 체 하며 적당히 주변과 타협하며 사는 것이 지혜로운 줄 알았다. 그런데 성경을 알고 예수님을 알고 목사가 되고 나니 그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 성도들의 삶은 어떤가? 교회와 성도가 정을 맞지 않으려고 너무 세속화 되지는 않았는가? 너무 쉽게 타협하고 교회를 향하여 달려드는 사자와 이리 같은 무리들 때문에 할 말을 잃어버리고 입을 다물고 있지는 않는가? 언제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칭찬하고 함께 공감하면서 길을 걸은 적이 있었는가? 오히려 세상을 향해 잘못을 지적하고 모난 돌로서 살았을 때 세상이 깨닫고 반성하고 정화되지 않았는가?


  이제 우리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것인지? 아니면 진리와 함께 고난을 각오하고 모난 돌로 살것인지? 선택해야 할 때이다. 누가 이 세상에서 모난 돌이 될 것인가?  


발행인 옥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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