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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교계일반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집단착각이 벌거벗은 임금이 되어 거리를 활보하게 한다.”

사회성을 중시하는 사회가 집단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사진=위키피디아)

  금값이 고공행진 중이다. 이런 금값을 한 송이 꽃이 따라 잡은 적이 있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소위 “튤립 광풍”이다. 병든 변종 튤립이 엄청난 가격으로 판매되면서 너도 나도 묻지마 투기가 일어났다. 저임금 노동자들까지 마치 집단광기에 사로잡힌 듯이. 이러한 현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사람들은 투자를 하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의 정보에 귀를 기울인다. 누군가가 어떤 종목에 투자하여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일어나면 너도나도 묻지 않고 투자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일종의 “집단착각”에서 일어난다.

  어린이들에게 사랑받았던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동화 이야기 중에 “벌거벗은 임금님”이 있다. 사치를 좋아하는 임금님에게 사기꾼 재단사가 접근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감으로 세계 제일의 옷을 만들 수 있다고 제안한다. 다만 이 옷은 “구제 불능의 멍청이”에게는 보이지 않는 옷이라고 하였다. 완성된 옷을 입은 임금님은 벌거벗은 채로 거리를 돌아다녔다. 신하들도 시민들도, 한결같이 “구제 불능의 멍청이”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너무 아름다운 옷입니다.”라고 외쳐야 했다. 집단착각에 빠진 것이다.

  우리는 언제 집단착각에 빠지는가? “평균의 종말”을 쓴 토드 로즈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실제로 좋아하지 않지만, 다수가 좋다고 하면 괜찮은 듯한 착각이 들거나 모두가 “그렇다”고 말할 때 “아니오”라고 답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한데, 이를 때 ‘집단 착각’에 빠진다고 한다. 실제로 신경과학자 그레고리 번스는 MRI(자기공명영상)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피험자들이 집단에 순응할 때마다 확신과 보상에 관여한 뇌의 영역이 활성화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피험자들이 집단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때면, 불쾌한 감정과 연관되어 뇌의 영역인 소뇌 편도가 피험자에게 ‘오류 신호’를 보내고, 그로 인해 피험자들이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도 증명했다. 결국 이런 모방은 사회성을 중시하는 인간이 오랜 시간 공들여 발달시켜 온 능력이다. 토드 교수는 인간은  “스스로 원치 않더라도 자신을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서 그들처럼 행동하도록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집단착각 현상은 지성인, 비지성인, 목회자와 평신도를 가리지 않고 공격할 만큼 위협적이다. 스코틀랜드의 언론인 찰스 맥케이는 1841년 펴낸 책 “대중의 미망과 광기”에서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튤립 광풍”을 비판했지만, 그로부터 몇 년 후 철도 주식 광풍에 휩쓸려 큰돈을 잃었다. 엄청난 배당금을 준다는 광고에 현혹돼 남들처럼 잘못된 투자를 하고 만 것이다. 그뿐 아니다. 존 스튜어트 밀, 찰스 다윈과 같은 인류사의 위대한 지성들조차 주식 광풍에 참여해 낭패를 봤다. 생각하지 않으면 광풍 노도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러한 일들은 선거철이 다가오면 확연히 드러난다. 소위 학연, 지연, 혈연으로 뭉친 이들은 묻지 마 선택을 하거나 알지 못한 채 나와 다른 이들을 비난한다.  4월 10일은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선택하는 선거날이다. 연예인, 다양한 단체들, 개인들은 말할 것도 없이 특별한 정당이나 후보를 지지한다고 선언하기도 한다. 개별화 되어서 살펴보고 지지해야 할 민주적 절차가 “우리가 남이가” 라는 집단화에 사로잡혀서 착각을 일으킨다.

  그리스도인들은 소속된 사회에 살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 사회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영적으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회에서 나그네며 이방인들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와 사회참여에 무관심해질 유혹을 받는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권자시다.
 인간 사회도 하나님의 절대주권 아래 있다
 양심이 말씀안에서 기능하도록 기도하라

 

  실제로 그러한 목회자와 성도들을 많이 만난다. 그러나 특정한 사회에 살고 활동하는 한 그리스도인들도 사회참여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또한 우리 신앙은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권자시기 때문에 인간 사회도 하나님의 절대주권 밑에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은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행동하여야 하므로 기존 사회를 인정하고 유지하려 하기보다는 그에 비판적이 될 수 있고 따라서 개혁적, 혹은 창조적 사회참여를 할 위치에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2)

  이러한 창조적 참여를 위해서는 집단착각에서 벗어나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사회문제를 성경 말씀으로 비판하고, 생각하고, 나누고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한다. 내가 속한 집단성을 벗어나기 어렵지만 각 사람에게 주신 양심이 말씀 안에서 기능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선거를 앞에 두고 여야간에 후보들의 소리가 연일 들려오고 있다. 공약이 남발되고 있다. 분별력이 요구되는 시간이다. 우리의 감정은 사실 “내가 싫은 사람은 그냥 싫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그냥 좋다.” 때로는 이러한 감정이 팩트가 되기도 하지만 감정만이 팩트가 될 때 우리는 낭패를 당할 수 있다. 부디! 4월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해 본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13:11)

 

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