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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발행인칼럼

아버지의 마음

묵은지 같은 아버지의 속 깊은 사랑, 십자가에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사랑을 생각나게 합니다.

 

『탕자의 귀환』렘브란트(1606~1669) 레닌그라드 에르미타주 미술관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시91:2)

  3월은 고난주간, 부활절이 있는 달이다. 이 시간이 다가오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읽어보게 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에 실린 ‘아버지의 마중’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퇴근하려는데 갑자기 검은 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더니 금세 비가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금방 그칠 비가 아닌 것 같아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얼마쯤 가다 보니 저쪽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손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고목처럼 여윈 팔을 이리저리 흔들며 웃고 계신 분은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말없이 나에게 우산을 하나 건네주고는 당신 먼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셨다. 얼떨결에 우산을 받아 든 나는 “고맙습니다.”라고 말했지만 그 다음엔 할 말이 없어 잠자코 아버지 뒤를 따라갔다. 그 뒤 비가 올 때마다 아버지는 어김없이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렸다가 우산을 건네주셨다. 

  그러자 나는 아버지의 마중을 감사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비 오는 날, 그날도 나는 아버지가 우산을 들고 마중을 나와 계실 거라 생각했는데 웬일인지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마중 나오지 않은 아버지를 원망하며 그대로 비를 맞으며 집으로 갔다. 비에 흠뻑 젖은 채 집에 들어선 나는 잔뜩 부어오른 얼굴로 아버지를 찾았다. 그런데 잠시 뒤 나는 가슴이 뜨끔해졌다. 아버지가 갈고리 같은 손에 우산을 꼭 쥐신 채로 누워 계셨던 것이다. “그렇게 말렸는데도 너 비 맞으면 안 된다고 우산 들고 나가다가 그만 몇 발짝 못 가 쓰러지셨단다.” 어머니의 말씀에 나는 끝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밭고랑처럼 깊게 패인 주름살에 허연 머리카락을 하고 맥없이 누워 계신 아버지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나는 내 자신이 너무 미워졌다. 마중 나온 아버지께 힘드실 텐데 그럴 필요 없으시다고 말하기는커녕 아주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 못내 부끄러웠다. 나는 그날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뒤늦게 깨달으며 한참을 울었다.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는 그때가 떠올라 가슴이 아파온다.’ 

  우리는 때로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곤 한다. 특히 오랫동안 지속된 참된 사랑 앞에서 그럴 때가 더 많다. 누군가가 베풀어 준 한두 번의 사랑에는 감사하면서도, 정작 묵은지와 같은 속 깊은 지속적인 사랑에는 감사하기 보다 당연한 것 처럼 생각한다.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의 이야기로 많은 설교를 듣지만 사실은 아버지의 마음에 대한 내용이다. 두 아들 중에 둘째가 아버지의 재산을 달라고 하여 그것을 가지고 나가 허랑방탕하게 된다. 그리고는 다 허비를 하고  결국 집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이 재산을 가지고 나가면 반드시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들의 자유를 위해 허용을 하신다. 이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줄 알면서도 그것을 만들어두신 이유는, 우리를 기계처럼 만들지 않으시고 자유를 주신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때 까지 수많은 선택(choice)을 하며 살아가는데 이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인 것이다.  부모를 선택하는 것이 나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또 자식을 낳아 길르면서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듯이 하나님도 나의 선택이 아니라 만세 전에 예비 된 작정이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서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부모가 자식에게 거는 기대처럼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지신 십자가의 사랑을 잊지 않고 배반하지 않기를 원하시고 바라고 계신다. 순결하고 흠이 없는 자기 아들을 죄인의 손에 넘겨 주신 것은 나를 위한 불타고 애타는 사랑의 표현이다.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부활의 소망을 가지는 이달이 되길 소망한다.  

발행인 옥재부 목사(북울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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