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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발행인칼럼

아름다운 시절

고운 옷 입고 세배 드리고 싶은데
그 어머니 업고 다니고 싶은데
엄마가 계신 천국을 오늘도 바라본다.  

 

그 어린 시절 엄마 생각 가득한 설날 풍경이다.(사진=석산호 블로그에서)

  나는 일찍이 우리 할아버지가 너무 좋았다. 6.25를 겪은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들과는 달리 나는 정전이 된 후에 태어났다. 우리 집이 거제 제 7 포로수용소 자리인지라 고향을 두고 다 소개를 당해 거제 삼거리 라는 동네로 피난을 갔다가 1954년 말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그 다음해 겨울에 나를 낳으셨다.

  시골 초가집은 다 철거가 되었다. 3년 동안 피난 생활을 하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지붕도 없는 집에서 거적데기를 둘러놓고 구들방에서 나를 낳으셨다.  우리 엄마는 할머니가 끓여주는 미역국을 받아 먹으며 산후 조리를 하셨다. 태어나 눈을 뜨고 사람을 알아보기 시작할 때,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내 곁에는 부모님보다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항상 계셨다. 우리 할아버지는 한복을 곱게 입고 긴 담뱃대를 물고 탕건을 쓰셨다. 집안을 호령하시며 어른으로 자리를 지키셨다. 그래서 어린 시절은 그냥 보기에 좋은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늘 할아버지의 눈치를 보셨고, 어머니는 10명의 식구들을 먹이시느라 언제나 부엌에 계셨다. 그때 어린 나의 눈에는 엄마가 마치 식모 같았다. 할머니는 머리를 곱게 단장하고 항상 깨끗한 모습이셨다. 초저녁 잠이 많으셔서 일찍 주무시고는 새벽이 되면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셨다. 길흉사가 있어 동네를 다녀오실 때면 할머니 손에는 항상 작은 보자기가 들려 있었다. 그 속에는 손주들 주려고 챙겨오신 떡과 부침개가 싸여 있었다.  당신이 드실 음식도 부족했을 텐데 손주들 생각에 먹지 않고 아끼고 남겨 싸 오셨다. 

  다들 열심히 일하느라 하루가 바빴다. 식사 시간이 다가오면 엄마손이 바빠진다. 시골 부엌에서 나무로 불을 지펴 그 불로 가마솥에서 밥을 지으시고, 나에게 어른들에게 식사시간을 알리게 했다. 나는 식구들을 찾아 일하는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면서 어른들에게 식사 시간을 알렸다. 나는 그 일이 참 재미있었다. 그러다가 설날이 다가오면 없는 돈 달달 긁어모아 설빔으로 우리 여섯 형제자매들을 위해 옷을 사주셨다. 어느 해 나에게는 모자가 달린 잠바를 하나 사주셨다. 아직 설이 되려면 몇 날이 남았는데 우리 엄마는 꼭 설날에 입어야 하니 그 옷을 옷걸이에 가만 걸어 두라 하셨다. 나는 그 옷이 입고 싶어 설날을 손을 꼽아가며 기다렸다.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드디어 설날 전날 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전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다 희어진다!”  어린아이가 눈썹이 희어지면 어른처럼 된다는 말인데, 그 말씀을 사실로 믿고 밤새도록 뜬눈으로 지샌 적도 있다. 설날이 다가오면 그래도 목욕을 해야하고 손에 묻은 때를 씻어야 항기에 가마솥에 소죽을 퍼내고 왕겨를 남겨서 순등을 문지르고 돌맹이를 주워 다가 때를 벗기고, 커다란 고무 물통을 가져다 물을 데워 목욕을 하면 소가 내 몸을 핥던 기억이 지금도 설날이 다가오면 생각이 난다.  

  지금은 설날이 다가와도 별로 재미가 없다. 그 이유는 엄마가 없기 때문이다. 엄마가 사주신 모자 달린 옷이 아니라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엄마를 찾아 세배를 드리고 싶은데 엄마가 없다. 그러니 갈 곳이 없다. 지금 어머니가 살아계신다면 예쁜 한복을 지어 입혀 드리고 싶은데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났다. 고운 옷을 입고 세배 다니고 그리운 어머니 옷도 입혀 드리고 그 어머니 업고 다니고 싶은데 언제 그날이 올까?

  나도 이제 그때의 엄마 닮은 나이가 되었으니 곧 천국에 가서 엄마를 만나게 될 날이 기다려진다. 엄마는 언제나 엄마인가 보다.  설날이 다가오면 더욱 그리워지는 엄마, 그 엄마가 먼저 가 계신 천국을 오늘도 바라보면서 나의 목회를 하나씩 내려놓는다. 남은 날들이 더 선명해지고 성숙되기를 바란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옥재부 목사(발행인, 북울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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