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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숙

박경리 문학관을 찾다 대하소설 ‘토지’를 쓴 박경리 선생의 발자취를 좇아 경남 하동으로 가는 중이다. 5월의 자연은 어느 곳을 바라봐도 한 폭의 그림이었다. 나뭇잎마다 연한 색이 점점 진하여 지면서 싱그러움을 더했다. 길가에는 노란 얼굴로 활짝 웃는 금계국이 살랑살랑 어깨춤을 추면서 우리를 반겼고 아카시아 나무는 기다란 꽃대에 흰 꽃을 방울방울 달고 향기로 우리를 반겼다. 세 시간 남짓 걸리는 먼 거리를 지루한 느낌을 받지 않고 목적지에 다다랐다. 이곳은 선생의 삶과 문학의 정신을 기리고 기억하고자 2016년에 건립했다. 문학관 뒤로는 지리산의 한 줄기가 뻗어 내린 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고 앞에는 섬진강과 어우러진 악양의 넓은 들녘이 펼쳐져 있었다. 이는 모두가 대하소설 토지의 주 배경이다. 평화로워 보이는 넓은 풍경.. 더보기
신불산 나들이 신불산이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억새밭에 낮게 내려앉았다. 쭉 뻗은 손끝에 하늘이 닿을 것만 같다. 울산의 12경답게 억새로 유명해서 텔레비전이나 사진으로는 많이 봐 왔는데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되니 꿈만 같다. 은빛 솜털처럼 보드라운 꽃을 피워낸 억새는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춤을 춘다. 억새꽃을 어루만진다. 목화솜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럽다. 귀를 기울이니 자기들끼리 몸을 부딪쳐 차르르르 차르르 소리를 낸다. 마치 나의 산 나들이를 반겨주는 팡파르 소리 같다. 얼마 전이었다.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과 차를 마셨다. 단풍철이 되어서인지 친구들은 산에 다녀온 얘기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오랫동안 함께 지낸 친구들인데 내 마음도 모르고 자기들끼리 희희낙락거리는 것이 은근히 섭섭했다. 산.. 더보기
선한 끝은 있어도 악한 끝은 없다 선한 끝은 있어도 악한 끝은 없다는 옛말이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옛 선조들이 말씀하신 속담이나 격언이 그릇된 게 없다는 걸 새삼 느낀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교육을 많이 받았거나 적게 받았거나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같아서 그런 모양이다. 내가 자라온 마을은 주로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으며 김, 연, 한 씨가 오밀조밀하게 집성촌을 이루면서 살았다. 이장은 마을의 성씨 중 과반수를 차지하는 김씨 문중에서 연속으로 나왔다. 마을에서 이장이라는 직함은 선망의 대상이었고 그 집안은 그걸 큰 자랑으로 삼았다. 그래서 이장 뽑는 날짜가 다가오면 연 씨는 한 씨의 표를 얻기 위해 물질 공세를 할 때가 많았다. 선출된 이장은 누구네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알 정도로 마을 사람들의 살림을 살피며 관심을 가졌다. 아.. 더보기
캠핑카 여행 어느 단체에서 코로나19로 집에서 지내는 장애인들에게 캠핑카를 대여해주고 1박 2일 여행경비를 지원하겠다는 공지가 있었다. 지원 신청서를 검토해 보고 심사하여 대상자를 선정한다고 했다. 곧 생일이 다가오는데 생일날 여행을 통하여 멋진 추억을 만들고 싶다는 장문의 신청서를 보냈다. 다행히 대상자로 선정되어서 남편과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코로나로 집에서만 지내는 반복된 생활에서 벗어나 캠핑카를 타고 떠나는 여행은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TV에서만 보아오던 캠핑카는 카니발 차 실내에 두 사람이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숙식 공간이 잘 꾸며져 있었다. 찌개 한 가지만 끓여서 먹어도 동심으로 돌아가 소꿉놀이하는 것처럼 재미가 쏠쏠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여건상 우리는 식사는 식당.. 더보기
디딤돌 새끼줄로 얼기설기 엮은 초가지붕 처마 밑에는 디딤돌이 놓여있었다. 그것은 봉당과 마당 사이에 있는 평평한 돌로 뜰을 오르내릴 때 디디라고 어머니가 나를 위해 가져다 놓았다. 봉당이 낮아 가족들은 마당으로 바로 올라서고 내려섰지만, 다리에 장애가 있는 나는 그렇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것을 늘 깨끗하게 닦아 놓으셨다. 그 디딤돌은 내가 세상 구경을 하고 싶을 때 스스로 내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마당 가장자리 담장 밑 화단에서 수런대는 꽃들을 가까이 보고 싶을 때나 친구들이 뛰어다니며 노는 모습을 보고 싶을 때 그것을 유용하게 사용했다. 엉덩이를 바깥쪽으로 향하고 다리를 곧추세워 디딤돌에 발을 디딘 다음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는 내가 잘 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으셨던 모양이다.. 더보기
"세상으로 나가는 구름판이 되기를" 울산의 빛 독자들에게 익숙한 수필가가 첫 번째 책을 발표했다. 바로 본지 신앙에세이 지면에서 수필을 연재한 수필가 김용숙 작가다. 김 작가는 2014년 계간 『동리목월』 신인상으로 등단해, 진솔하고 울림이 있는 글을 써 오고 있다. 편집자 주 첫 번째 책 출간을 축하드린다. 어떻게 책을 쓰게 되었는가? “어린 시절 고열로 인해 소아마비를 앓아서 두 다리가 불편하다. 학창 시절에는 글짓기 부에서 활동도 하고, 교내에서 상도 여러 번 받았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살림과 육아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글쓰기는 밀려났다. 특히나 부모가 모두 장애가 있다는 것이 남들이 볼 때 흠이 될까 하여 두 아들에게 많은 신경을 쏟았다. 이웃에서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많이 도와주셨지만, 어쨌든 아이들을 책임지는 것은 부모의 몫.. 더보기
친절하게 배웅까지 결혼 전에 있었던 일이다. 다리 수술하러 병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추수철이라 일손이 모자라서 부모님 대신 두 살 위의 언니랑 함께 가기로 했다. 충북 지역에서는 여수까지 바로 가는 기차가 없어서 조치원역까지 버스를 타고 나가야 했다. 조치원역은 경부선 기차가 다니는 역으로 서창역과 내판역 사이에 있다. 우리는 밤차를 타려고 해가 설핏할 때 나섰기 때문에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역에 도착했다. 그곳은 환승역이라 그런지 진풍경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을밤이라 싸늘한데도 노숙자들이 곳곳에서 신문지 몇 장을 이불 삼아 잠을 청하고 있었다. 어떤 걸인은 잔돈이 없다고 하는 사람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더니 결국, 몇 푼을 얻어 냈다. 한 남자는 아가씨를 강제로 끌고 가려고 했다. 여자가 발버둥을 쳤지만, 억센 남..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