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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교계일반

9월 예찬

울산체육공원 마로니에 광장의 가을 (사진=포토울산)

  “목사님~ 너무 더워요…….”
  폭염이 넘실거릴 때였다. 아웃리치를 하던 다음세대들의 아우성 소리가 매미 소리마냥 귓전을 울렸다. 문득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시원함을 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하지? 에어컨? 선풍기? 이것으로 시원함이 설명이 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나무와 개울가, 숲 그리고 그 사이에서 불어오는 조용한 바람으로 다가가면 그 안에서 시원함이 뭔지를 배우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묘하다. 시원함이란 결국 공동체 안에서 타자에 대한 고마움을 내가 알게 될 때 누리는 즐거움이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결국 내가 시원함을 누리는 신비인 것이다.
  9월이다. 그리스어로 숫자 9는 엔네아드(ἐννέα)라 불리우는데 한자리 숫자로는 제일 큰 단위로서 완성과 전체성의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추석이 있는 9월은 만월이라는 충족성을 만끽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언제나 충족성은 흘러보냄과 연결되어 있다. 흘러보냄은 아웃리치로 표현될 수 있다. 흘러보낼 때 충족성은 아름답게 유지된다.
  울산에는 5만 여 명의 장애인들이 있다. 그 중에서 자폐증을 포함한 발달장애인은 약 4천 명이 넘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인들을 위한 전문 사역자를 보유하고 있는 교회는 아주 드물다.
  그런 측면에서 시원함을 가질 수 없는 우리는 여전히 폭염이다. 4영리를 이해할 수 없는 지적장애인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여전히 풀기 어려운 난제이다 한국 기독교 120년역사 가운데서 아직도…….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먹먹한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우리가 그들의 숲이 되어 주면 어느 순간부터 그가 우리의 바람이 되어져있다.
  그러므로 어느 한편에게만 무조건 희생을 강요하는 공동체는 없다. 소금과 빛으로 살라는 말씀은 결국 내가 살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더욱 더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다.(마7:7) 철저히 십자가의 길로 가야 한다. 그것이 교회가 살길이다.
  또 한편, 9라는 숫자는 10이라는 “더 높은 단위로 올라가기 위한 마지막 견딤”을 요구하는 훈련의 절정이기도 하다. (행1:14) 오순절날 성령강림을 기다렸던 제자들은 9일동안 간절히 기도하였다.(행1:14)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풍성한 곡식과 과일들이 있는 계절이다. 그런 열매는 견딤에서 오는 것이다. 붙들고 견디고 갈 때에 숙성된 열매가 맺힌다. 태풍도 맞아들이고, 어두운 밤도, 폭염도, 메마름도, 주인의 안타까운 마음도. 그냥 받아들이며 결실하게 하신 주인을 기대하며 견딜 때 어느 시점에 그들은 꽃이 되고 열매가 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하시는 분들이 많으시다. 통계를 통하여 구체적인 성도 수 감소의 수치까지 들먹인다. 하나님을 계산에 넣지 않으면 언제나 우리는 위기다. 하나님은 주어에 두면 질서가 잡힌다. 창조의 시작도, 복음서의 출발도, 종말의 입문도 모두 주어가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하나님이...(창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계1:1)”

  하나님없이 말하는 모든 위기론은 가짜다. 믿지 말라. 그냥 주와 함께 기쁨으로 견디며 동행하라. 곧 결실할 계절이 다가올 것이다. 그것이 9월이다. 그래서 9월은 창조적이고, 종말론적이며, 복음적이다. 할렐루야 아멘.          
편집국장 최성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