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러난 능력보다 더 중요한 “소유한 권위”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제자들은 하나같이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누가복음 9장 1절에서 능력과 권위(power and authority)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 능력과 권위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능력이 드러난 힘, 눈에 보이는 힘이라면 권위는 내제된 힘, 보이지 않는 힘입니다.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것은 능력입니다. 하지만 권위는 그 능력의 출처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연약한 여성이라도 그녀가 경찰복을 입고 나타나면, 힘센 남자도 그녀를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 배후에 국가라고 하는 강력한 힘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가진 능력보다 그의 배후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가진 힘의 수준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드러난 능력보다 소유한 권위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공동체, “교회”
세상 속에 있는 교회는 평범한 인간들의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모임이든 우리 성도들의 모임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배후에 누가 계신지, 누가 우리를 돌보고 계신지를 우리도 알아야 하고 세상에 보여 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위 있는 교회, 권위 있는 성도는 목에 힘이 들어간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하여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드러내고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공동체를 말합니다.
“성도가 살아가는 모든 영역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
구약의 언약궤가 바로 이런 권위의 상징이었습니다. 언약궤가 이스라엘 안에 있다는 것은 이 공동체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권위는 자신들의 가진 능력에 있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임마누엘의 상징인 언약궤가 그들과 함께 할 때, 삭막한 광야나 범람하는 요단강이 그들의 가는 길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고백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의 시편 23편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유대광야에 내 몰렸던 다윗은 돕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를 도우면 그 즉시로 사울왕에게 보복을 당했기에 아무도 다윗을 도울 수 없었습니다. 그는 유대사회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한 외톨이였고 그가 거했던 광야는 모든 희망을 꺽어버리는 두려움과 절망의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에게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바로 목자되신 여호와께서 나를 돌보시는, 그분의 임재를 누리고 있었기에 광야의 부족함이 다윗에게 문제가 되지 않음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성도의 권위가 살아있는 곳에
임하는 참된 평화
교회는 이 세상에 없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성도들이 살아가는 모든 영역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그를 인식하고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이 그의 돌보심을 누리는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여기서 성도의 권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도의 권위가 살아 있는 곳에는 평화가 임합니다. 신약성경을 보시면 초대교회의 특징이 교회 안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돈이 많아서 구제를 많이 할 수 있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교회가 그들의 가족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가족은 약한 사람부터 챙깁니다. 집안에 장애인이 있으면 온 식구들이 그 장애인을 중심으로 모든 계획을 세우고 그가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해주려고 노력합니다. 자라나는 자녀들도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가족의 의미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정의 위기가 왔다고 하는 것은 가정 안에서 이런 감정노동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살아나려면 감정노동이 필요합니다. 시선 맞추고 대화하기, 상대가 말할 때 고개 끄덕여주기, 웃어주기, 전화걸기, 문자하기 등등... 사실 이 감정노동은 에너지가 많이 드는 피곤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게 가정에 있어야 화색이 돌게 되고 웃음꽃이 피게 됩니다. 대개 가정에는 중재 역할을 하는 천사들이 있습니다. 보통 막내들이 눈치가 빨라서 이 역할을 감당합니다. 아빠 엄마가 싸웠거나 형과 누나가 싸웠을 때,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면서 서로를 달래고 소통시키는 역할을 막내가 합니다. 감정노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몸부림이 다시 가정의 능력을 회복시킵니다.
왜 나에게 더 주셨을까?
기꺼이 “감정노동”을 하라!
인생을 살다보면 각자에게 주신 은혜가 다 다릅니다. 특별히 받은 은혜가 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는 우쭐거릴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해야 합니다. 왜 나에게 더 주셨을까? 왜 나에게는 풍성하게 주셨을까? 그 대답은 기꺼이 감정 노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독을 품고 사는 사람, 절망에 빠져 사는 사람, 몸과 영혼이 아픈 사람 그들을 품어주고 섬겨서 이들이 다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도록, 그 사명을 잘 감당해 달라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권위가 사라졌다는 말들을 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단순히 질서가 없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주변을 돌아보아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살벌하게 대치하고 있고, 징징대며 울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른이든 젊은이든 모두가 이익을 쫓아 살고 증오의 에너지로 살아가는 삭막한 사람들 뿐이라는 뜻입니다.
압도적인 은혜의 예배로 회복되는 권위
권위가 회복되려면 압도적인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 압도적인 은혜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이 임재를 맛보아야 합니다. 바로 그때, 내가 아직도 이 땅에서 진멸되지 않은 이유가 그분의 무궁하신 인자와 긍휼 때문임을 알고(애3:22) 주님의 임재를 찬양하며 가정과 세상을 섬길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사람만이 그분의 돌보심을 느낍니다. 그분의 아름다운 이야기(beautiful story)를 내 삶으로 만들어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임재 없이 일하지 마십시오. 권위 없이 나서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일에 인생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게 성도의 삶이고 우리가 가야 할 가장 권위 있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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