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성을 잃어간 대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은 자유 독립 국가이다.” 너무 당연하게 들리는 말이다. 그러나 불과 80년 전만해도 ‘자유 독립 국가 대한민국’이라고 말하면 피를 부를 수 있는 언어였다. 자유롭지도, 독립적이지도 못한 나라에서 살아보지 않아 체감을 할 수 없지만, 목숨 걸고 탈북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유국가가 얼마나 소중한 자산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근대국가인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 세워지기 전인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국호를 대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다. 청나라, 일본, 러시아 등 아시아 열강들과 미국 프랑스 등 서방 열강들이 서로 조선에 접근하고 힘을 과시하면서, 조선이 점점 독립성을 잃어버릴 지경이 되자 스스로 독자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황제로 자칭하며 대한제국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1876년 2월에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선에 대한 경제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결국 청일전쟁(1894), 러일전쟁(1904)을 거치면서 사실상 일본령으로 만들기 위한 실질적 작업을 끝냈다. 일본은 영일동맹,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의 외교적 작업을 진행하면서 일본의 한반도 장악에 방해가 되는 국제 열강 세력들을 제거함으로써 1904년 한일의정서, 군사경찰훈령, 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 등을 강요하여 치안권, 재정권을 빼앗았다. 1905년에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강탈하였다.
또한 1907년 정미 7조약으로 행정권, 입법권을 박탈하고 군대를 해산하였다. 1909년에는 기유각서로 사법권을 박탈하고, 1910년 6월에는 경찰권마저 빼앗아버렸다. 경술 국치 직전의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만 독립국이었을 뿐, 사실상 일본의 일부나 다름없는 상태였고 1910년 경술국치로 멸망하고 말았다.
독립을 위한 투쟁과 2.8만세 사건
나라를 잃은지 10년이 되던 해인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나면서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본격적인 투쟁이 시작되었다. 일본에 독립을 청원하자는 온건파 운동부터 무장 투쟁을 통하여 나라를 세우자는 강경파투쟁까지 방법론에 차이가 있긴 하였지만 모두가 동일한 심정이었다. 우리는 독립선언문에 서명하고 발표하고서는 곧바로 경찰서에 자수하고 체포되었던 기독교인 16명, 천도교인 15명, 불교인 2명 등 33인의 용기는 놀랍다. 무엇보다도 ‘아무리 독립운동이라고 할찌라도 기독교가 천도교와 함께 손을 잡을 수 없다’, ‘목사가 정치에 개입하면 안 된다’며 반대하는 자들 때문에 주저앉을 뻔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나라 없이 교회 없다’는 한마디로 신학적 신앙적 갈등 요소를 단숨에 해결한 기독교 장로 이승훈 오산학교 교장은 우리 민족이 잊을 수 없는 영웅이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어야 한다는 바른 신앙이 나라를 살려내는 기초석이 되었다.
기독교를 통해 자유와 평등사상을
습득한 청년들, 삶을 던져 움직이다!
역사에 길이 남을 삼일만세운동을 기념하면서 무엇보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기를 바라는 해야 할 일이 있다. 삼일운동 직전 일본에서 일어났고, 삼일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2.8독립선언 사건(1919.2.8)>이다. ‘2.8 만세선언’은 생각할수록 놀랍다. 일본 유학생들은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하여 창씨개명이라는 굴욕적인 행동을 감행하며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민족시인 윤동주는 ‘별헤는 밤’을 통해 개명(改名)에 얽힌 고통을 너무 잘 그려주고 있다. 아무리 독립이 중요하여도 일부러 힘들게 바다를 건너온 일본 유학생 신분인 그들이 나설 수 없는 일이었다. 잡히면 감옥으로 가거나 쫓겨나야 하고, 원하던 삶을 포기해야 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삶을 던졌다.
재일본 동경 조선 기독교청년회(YMCA) 회관에 모인 600여 명의 학생 중 60여 명이 체포되고 8명이 기소되었고 120여 명은 한국으로 돌아가 곳곳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연세대 김명구 교수는 <2.8 독립선언과 기독교>라는 글을 통해(월드뷰, 2019.3월호) “2.8 독립선언은 ‘정의’ ‘자유’ ‘평화’ 신부적(神賦的) 인간관에 따른 개인의 존엄성이 핵심이었다”며 기독교적 영향이 지대했음을 지적한다. 그와 함께 상해임시정부가 채택하고 후일 건국 당시에도 그대로 받아들인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은 2.8 독립선언을 기초했던 이광수가 관철시킨 것이었다. 이광수는 후일 헌법 제1조가 기독교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음을 밝히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가 기독교에 의해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임시정부 내무총장을 지낸 도산 안창호도 미국기자와의 회견에서 이광수와 같은 의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모든 것을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앙의 힘으로
동경의 유학생들은 대부분 미션스쿨이나 교회, YMCA등 기독교를 통하여 자유와 평등사상을 습득하고 그렇게 의식화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일본이라는 장소에 위축되지 않았고, 육신의 출세라는 명분에 사로잡혀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일도 없었다. 일본 유학생이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상식이나 논리에 전혀 맞지 않음에도 그들은 상식을 뛰어넘었다. 그 불굴의 용기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권력과 전혀 상관없던 그들이 어떻게 자유와 정의, 평등, 독립이라는 고상한 가치에 자신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일까? 1919년 2월의 동경 조선 YMCA는 단지 장소만 빌려준 곳이었을까? 편협한 이념과 사상에 사로잡혀 우리 사회를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있는 분열과 갈등의 요소를 거두어낼 방법은 무엇인가?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2.8운동과 삼일운동에 담겨있는, 모든 것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앙의 힘이 3.1절을 맞는 오늘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특집 > 특별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가 순종하면 하나님은 살리신다 (0) | 2023.04.03 |
---|---|
2023 부활절 연합예배, '울산이여 일어나라!' (0) | 2023.03.31 |
울산 지역 교회 표어 키워드 "예배", "공동체", "사랑" (0) | 2023.02.02 |
우리가 나아갈 길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입니다 (0) | 2023.01.02 |
수고한 당신, 분노의 검을 내려놓고 기쁨을 항상 휴대하십시오! (0) | 2022.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