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산이 무너져 내리지 못하도록 옹벽이 쳐져있다. 봄부터 여름 내내 옹벽 꼭대기를 한 남자가 왔다갔다 했다. 그가 신은 기다란 장화가 거미 다리처럼 부지런하더니 난간에 그물망을 쳤다. 그러더니 어느 날은 물조리개로 물을 뿌렸다. 그동안 땅을 고르고 씨를 뿌렸던가 보았다. 옹벽 위 텃밭의 열매를 아래에서는 올려다볼 수 없었지만 날마다 높은 텃밭에 사는 그 남자의 얼굴은 점점 밝아 보였다.
여름이 되자 그가 짜놓은 난간의 그물망에 이파리들이 돋아나고 자랐다. 분명 그가 가꾸어 놓은 텃밭을 기운삼아 탯줄이 생긴 모양이었다. 얼마 안가 손가락보다 조금 굵은 오이 하나가 숨은 그림 속 그림처럼 눈에 띄었다. 그러자 보이지 않았던 오이와 가지와 호박들이 줄줄이 입체그림처럼 불을 켜며 내 눈을 비추었다. 나는 한동안 탯줄에 매달려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열매들의 수를 헤아려보는 재미가 좋았다. 비록 내가 지은 농사는 아니지만 주인 못지않게 열매에 대한 환희가 일어났던 것이다. 주인이 열매를 거두는 것도 알 수 있었고 새롭게 열리는 것들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주인이 호박은 그냥 두는 것이었다. 나는 이번에는 호박의 무게를 생각하며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릴까봐 조바심이 일었다. 호박은 하루하루 덩이가 커져갔고 색깔도 초록에서 노랗고 누렇게 변해갔다. 뿐만 아니라 껍질도 딱딱해져가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도 호박은 떨어지지 않았다. 땅은 탯줄을 통해 끊임없이 영양을 공급했고 호박은 땅의 양분과 하늘의 비바람을 헤치며 성장과 성숙을 해나갔다. 그 받침대가 가느다란 줄기 하나였으니 나는 그 탯줄의 힘에 새삼 놀랐다. 그 탯줄이 어찌 만들어졌으며 그 힘은 또 어디서 생겼는지, 호박은 어찌 그것만을 의지한 채 절벽 같은 옹벽 꼭대기 난간에서 당당하게 자릴 잡고 있는지, 그 모두가 놀라웠다.
나는 텃밭 주인이 그 중에서도 오래오래 놔 둔 늙은 호박 한 덩이를 오며가며 바라보았다. 한밤중에도 가로등삼아 그 아래를 찾아갔다. 태양보다 밝고 달보다 밝은 늙은 호박이 의지한 외줄의 힘에 가슴이 벅찼다. 저렇게 아무런 의심도 불안도 없이 의지할 수 있는 줄 하나만 인생에 있다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짧은 인생이지만 존재하는 동안 저리 당당하고 밝은 빛을 낼 수 있는 호박처럼 내 인생이 걸려있는 탯줄을 생각했다. 나는 어디서부터 영양을 공급받으며 누구를, 어떤 세상을 비추고 있는가. 봄여름가을까지 땅을 경작하고 씨를 뿌리고 물주고 잡초를 뽑아주었던 농부, 열매를 가꾸어주었던 농부, 그분에게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호박 한 덩이가 부러웠다. 그 날을 위해 생기를 끝없이 공급해주는 탯줄의 힘과 그 탯줄을 꼭 붙잡은 호박의 믿음도 그지없이 부러웠다.
가을 끝자락까지 농부는 옹벽 위 난간에 매달린 호박을 그냥 두었다. 그리고 내가 한 해의 마무리를 할 무렵 감쪽같이 그 호박을 거두어갔다. 텃밭 난간의 그물망에는 말라 오그라 붙은 검은 넝쿨줄기들이 희미하게 붙어있었는데 마지막까지 달려있던 그 누렁둥이 커다란 호박의 그림자가 한동안 눈앞을 아른거렸다.
다음 해에도 남자는 이른 봄부터 옹벽 위에서 살았다. 텃밭을 왔다 갔다 하는 성실한 그의 손길을 올려다보느라 나는 목이 빠질 것 같았다. 이번에도 오이와 가지들을 숨은 그림처럼 찾아내는 재미에 빠졌다. 열매들은 옹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기들을 한번 취해보라고 약을 올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열매들 쯤이야 가소롭고 내 눈엔 이미 호박 한 덩이가 자릴 잡기 시작했다. 새로운 꼭지가 난간 덩굴 하나에 달리는 중이었다. 땅은 쉴 새 없이 영양분을 다져서 탯줄로 공급하고 호박도 쉬지 않고 몸을 불릴 것이었다. 이 어둡고 암담한 시절에 둥그랗고 누런 등불들이 저 부지런한 농부의 손에 의해 또다시 불을 밝히리라.
코로나19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스러졌다. 코로나19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변이를 이루며 인간을 잠식하는 독초처럼 번져가고 사람들은 아직도 우왕좌왕하며 외줄 위에 올라서는 기분이다. 여차하면 헛발을 디딜까 조심조심 또 조심하며 하루하루 불볕 아래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하다.
호박과 땅을 이어주는 하나의 줄기만 확실하게 주어진다면, 그것을 만든 믿음의 손길 하나만 어떠한 의심 없이 붙잡을 수 있다면 코로나19 아닌 어떤 재해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 강한 탯줄을 드리운 농부가 결코 호박이 옹벽 아래로 떨어질 때까지 내버려두지 않는 것처럼, 어느 날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거두어갔는지 알 수 없지만 호박은 농부의 방 한켠에서 겨울을 날 것이다. 삶이 옹벽 위의 텃밭에서 세상의 한 덩이 빛으로 살다가 주인이 탯줄을 잘라주면 그때부터 또 다른 평안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설성제 집사
태화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