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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특별기고

제가(齊家)의 회복


Post Covid19, 가정과 교회는?


 


팬데믹의 풍경, 생소함을 가져오다

코로나19는 전에 우리에게 없던 경험들을 주었다. 마스크가 우리의 얼굴을 덮는 사이, 꽃이나 단풍이 산천을 뒤덮는 그 좋은 계절에도 우리는 밖으로 다니지 못했다. 세계 사람들의 왕래가 줄어들고 하늘에선 비행기가 줄어들었으며 경제활동도 쪼그라들었지만, 우린 그 덕에 한동안 미세먼지 없는 하늘을 돌려받았다. 가게와 음식점에 손님이 줄어 자영업자들이 고통받는 사이, 온라인 판매와 배달업은 특수를 누리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고 비자발적 홈스쿨에 들어갔다. 어른들은 그들의 상황을 안타까워했지만, 정작 아이들은 비대면 덕에 그 흔한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건강하게 자라났다. 한편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그토록 이상적으로 여겨지던 재택근무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자녀들과 집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 부모들이 힘들다며 아우성을 쳤다. 통계에 따르면, 50~65% 정도 가정 폭력이 늘어났다 한다.

세상 많은 일의 이치가 그러하듯, 코로나는 우리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함께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그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 가운데 한 가지 공통점을 꼽자면 아마도 생소함일 것이다. 야릇한 일들이 벌어지는 생경한 시대, 다름 아닌 코로나 팬데믹의 풍경이다. 그중에서도 자못 생경한 풍경은 교회가 코로나와 싸우는 방식이었다. 코로나19 국내 전파 초기, 가까운 중국을 통해 유입된 한국의 감염자 수가 세계 최고 수준을 찍을 때였다. 당시 변이의 치사율은 사스나 메르스에 버금가는 정도로 이해되고 있었다. 아직 팬데믹으로 넘어가지는 않은 시기였으나,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만큼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주일, 대부분의 교회가 주일 예배를 비대면으로 전환하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는 종교활동과 관련된 정부 지침이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교회가 자발적으로 공예배를 온라인으로 전환했다. 우리나라 교회 역사상, 신사 참배 거부 시절 이후에 처음으로 발생한 일이었다. 한국전쟁 때에도 주일 공예배는 멈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천지에서 코로나 집단감염이 일어나 사회가 그들의 이단성에 주목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내심 흡족해했다. 우리 중에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며 쾌재를 부르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교회들을 통해 코로나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헤아리는 것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으리라 하셨는데, 참으로 그렇게 되었다. 세상은 신천지인들을 미워했던 만큼 개신교인들을 미워했다. 정부는 신천지에 적용했던 엄격한 기준 그대로를 종교단체들에게 요구했다. 2년여간 코로나 감염의 파고가 낮아지다 높아지는 일이 반복되며, 교회들은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 사이에서 널을 뛰어야 했다. 비자발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정부 지침에 의해 주일 공예배의 대면, 비대면 여부가 결정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일부는 그것을 이웃사랑의 정신으로 해석해서 받아들였으며, 다른 일부는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모욕으로 여기고 저항했다. 

 

가족교회학교에서 아버지와 아이들이 함께 하고 있다.


무너져버린 ‘주일성수=교회당 출석’의 신학
“패치 업데이트”를 준비하라

그 와중에 젊은 신자들 사이에는 온라인 예배가 자리잡았다. 그간 주일 공예배를 지탱해 오던 ‘주일성수=교회당 출석’의 신학이 무너져 내렸다. 많은 젊은 가정들이 중간중간 대면 예배가 허락되는 시기에도 교회당에는 출석하지 않고 온라인 예배를 고수해서 사역자들의 애를 태웠다. 예전 같으면, 사역자들이 “어디 주일 예배를 빠뜨리냐”며 호통을 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공식이 통하지 않았다. 그것이 젊은이들의 마음이 강퍅해져 일어난 일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과 다르게 사역자들 스스로에게도 그 공식을 외치는 일이 무언가 어색해졌다. 뉴 노멀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내가 전에 믿던 바와 다르기에 일정 부분 불편하면서도, 전과는 다르게 나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요상한 기운, 그것이 바로 뉴 노멀의 특질이다.

그간 신자들의 신앙을 드라이브하던 가장 강력한 동력이 그렇게 뉴노멀 뒤켠으로 사라졌다. 마지노선이라 강조하며 이것만은 포기해선 안 된다고 가르쳤던 일들은 옛 추억이 되었다. 사역자들은 답답함을 느낀다. ‘대면 예배가 회복되면, 그들의 신앙도 회복될까?’ 이 의문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 스스로 주일성수의 공식을 깨뜨렸기 때문에 자초한 결과라고만 볼 수는 없다. 정부가 우리를 핍박했기 때문이라고 여기기엔 어딘가 궁색하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 코로나19는 먼 장래의 일로만 보이던 4차 산업혁명의 줄기를 강하게 끌어당겨 가까운 미래의 일로 만들었다. 뉴 노멀은 우리의 신학과 신앙에 업그레이드를 요청서를 보내고 있다. 곧 플랫폼이 바뀔 예정이니, 당신네들도 패치를 업데이트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풀뿌리 신앙, 가정에 주셨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무엇을 어떻게 업데이트할 것인가이다. 감사한 일은 하나님께서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지나는 우리 대부분이 동의할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를 주신 것 같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정’이다.

전 지구를 휩쓸었던 물난리로 모든 인류가 절멸하고 지구상에 오직 한 가정이 남았을 때, 그 가정은 스스로 제사를 드리며 주님을 찾았다. 신사 참배를 거부했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교회당에 모이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분들은 여전히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며 주님을 만났다. 저 북한 독재 정권의 악랄한 핍박이 여전한 오늘, 북녘땅의 어느 집에서는 몰래 가족만의 예배가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철옹성을 주신 것이다. 그 어떤 자연재해나 병마도, 그 어떤 핍박이나 사상이나 악한 정부도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성, 그것은 바로 우리 가정들이다! 참으로 감격스럽지 아니한가? 한 가정이 마음먹고 스스로 주님을 추구하면, 그건 세상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다.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한, 밟고 뽑고 불살라도 결코 멸절되지 않는 풀뿌리 신앙, 가정에 주셨다. 

성경적이면서도 간결하며 
매우 유기적인 해결책, “가정”

코로나 기간 동안 우리 교회들에게는 그 풀뿌리 신앙을 회복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주어졌다. 그것은 참으로 기회였다. 코로나 사태로 교회당 대면 예배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을 때, 나는 교회들이 무엇을 할 지 몰라 당황하고 있음에 매우 놀랐던 기억이 있다. 어찌할 도리 없이 대면 예배를 인터넷 생중계 예배로 전환하였으나, 여러 모로 상당히 아쉬운 해결책이었다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보다 성경적이면서도 간결하며 매우 유기적인 해결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가정이었다. 그런데 대부분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거의 모든 교회 안에는 이미 장로와 집사가 세워져 있고, 어떤 형태로든 구역 조직이 살아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든 예배당에 모이지 못하게 되었을 때의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다. 구역별로 예배를 드리면 된다. 리더가 되는 장로와 집사들이 자신이 속한 구역의 신자들을 자신의 집에 초청하여 소규모로 주일 예배를 인도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역자들은 그 리더들이 예배를 잘 인도할 수 있도록 리더들만 따로 모아 훈련을 시켜줄 수 있다. 방역지침을 전혀 어기지 않고, 사회의 지탄을 받지 않으면서도, 절대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을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방역지침에서 제한하는 인원 제한의 수가 적어지면, 구역을 더 잘게 쪼개 모일 수도 있다. 단 두 가정만 모여도 그곳은 이미 교회가 아닌가? 그런데 우린 왜 그것을 보지 못했을까?

 

풀뿌리 신앙, 가정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의 진짜 교회는 건물에 가려졌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설교나 찬양이나 성경 공부 모임 등을 통해 다음과 같이 건강한 구호를 충분히 많이 들어왔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믿는 자들의 모임이다.”, “삶으로 살아내는 삶의 예배를 드리자.”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추구해 온 교회 사역은 그 구호들과 꽤나 거리가 있었다는 점이 코로나 시기를 통해 드러났다. 옥성득 교수는 “한국 개신교회는 십계명에 있는 안식일 성수 조항을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과 지나치게 동일시했다”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다만 안식일 문제만이 아니다. 그간 대부분의 교회 사역은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더 교회당에 나오도록 하는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예배를 통해, 봉사를 통해, 성경 공부를 통해, 기타 프로그램들을 통해 교회 땅을 밟게 하면 그것이 사역 성공과 다름이 없다는 식의 접근이었다. 다분히 공간 중심적이었다.

건축가인 유한준 교수는 공간이 주는 권력 구조가 있다고 말한다. 교실 안 학생들의 책상이 한 방향을 향할 때, 그 눈들이 모이는 곳에 서 있는 교사는 권력을 가지며, 교회당 안의 사람들이 한 곳을 바라보며 귀를 기울일 때, 거기에 서 있는 찬양 인도자나 설교자는 자신이 원튼 원하지 않든 권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초대의 교회들은 그렇게 공간이 주는 권력 구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특정한 건물 없이 아무개의 집에서 둥그렇게 모였기 때문이다. 이쪽에서 한 사람이 일어나 예언(설교)을 하면 다음에는 또 저쪽에서 일어나 예언을 했다. 때로 그로 인해 볼썽사나운 일도 있었지만, 적어도 신자들은 특정 누군가가 아닌 성령께서 예배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점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그에 걸맞은 공간과 예배, 더불어 교회 안에 조직적인 권력 구조가 생겨났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그 구조하에서는 성경조차 아무나 읽을 수 없었다. 평신도가 주님의 말씀을 직접 접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감사하게도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우리는 성경을 읽을 수 있고, 성만찬에도 참여하거나 찬송도 직접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스위스 제네바에 칼뱅이 가르쳤다는 생피에르 교회에 가본 적이 있다. 여담이지만, 칼뱅이 직접 앉아서 가르쳤던 의자도 전시되어 있다. 그 건물은 원래 성당 건물이었으나 종교개혁 이후에 성상들을 다 치워서, 건물 곳곳 성상들의 자리가 비워져 있다. 그러나 그 건물 자체의 화려함과 공간이 주는 중앙 집권적 구조는 여전하다. 그래서일까? 종교개혁의 후예인 우리도 로만 가톨릭 식의 공간이 주는 안정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듯하다.


“교회당 출입의 신앙”에서 벗어나자

아는 후배 중에 참 착하고 주님을 믿는 믿음도 없잖은 이가 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의 신앙생활은 계속 교회를 겉돈다. 주님이 주신 착한 심성과는 달리, 가정환경이 퍽 불우했고, 그것이 여러 형태로 늘 그의 발목을 잡는 듯했다. 서울의 단칸방에서 비싼 월세를 내가면서도 그래도 꽤 괜찮은 직장을 얻어 열심히 생활하다가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는 낙향한 상황에서 나를 만났다. 우리는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는 선후배 관계가 되었다. 어느 날 지나가는 말로 그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형, 서울에 있을 때, 00교회 앞을 지나가는데 정말 마음이 어렵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을 지었다는 그 교회를 말하는 것이었다. 서울에는 집이 없어 월세방과 고시원을 전전하는 젊은이들이 허다한데, 자신들의 상황이 교회의 화려한 건물과 너무나 대비된다는 것이 그의 요지였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할 말을 잃었다. 나 스스로가 흙수저에 월세방을 살고 대형 교회를 다니며 자랐지만, 단 한 번도 교회 건물이 내 집보다 좋아서 마음 아팠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그의 마음에 완전히 공감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시간이 어느 즈음 지나 생각해 보니 그의 마음이, 그와 비슷한 처지의 청년들의 상황이 아프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교회는 믿는 자들의 모임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건물 중심의 사역을 펼치며 교회당 출입의 신앙에만 만족하고 있을까? 우리의 진짜 교회는 건물 뒤에 가려져 있다. 코로나는 그걸 깨닫게 해 주었다. 


“신앙의 기본 단위는 교회가 아닌 가정이다”

역시 종교개혁의 후예였던 페스탈로치는 이런 말을 했다. “그대들의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며 일하고, 가족을 본받아 하나님을 찾도록 하고 겸손하게 거닐도록 가르쳐라.”

신앙의 기초는 교회가 아닌 가정이다. 각 가정이 신앙 위에 올바로 서도록 돕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이해가 하나 있는데 신앙의 기본 단위는 개인이 아닌 가정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아담 한 사람으로 인류를 시작하지 않으셨다. 아담과 하와가 부부가 되어 이룬 가정이 인류의 시작이었다. 바울이 간수장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하지 않았고,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했다. 종교개혁 당시 어떤 집안의 아버지가 신교로 개종하면 그때부터 그 가족 모두는 자동으로 신교 신도가 되었다. 애들 하나하나 붙잡고 “너 앞으로 개신교회 출석할래?”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온 나라의 교회가 다음세대를 걱정한다. 교회 안에서 다음 세대가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을 위한 온갖 프로그램을 만들어 돌리는가 하면, 각종 자녀 양육 세미나를 열어 부모들을 초청한다. 그래서 그런 자리에 가 보면 아이들이 있다. 어머니들도 있다. 그런데 아버지들이 없다. 그러고 보니 교회 안에서 아버지들의 자리가 많지 않다. 성경 공부 시간에도 중보기도 시간에도 구역 모임에도 여성들은 충만하나 남자들은 간데없다. 오죽하면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을까? 어느 식당에 단체 손님이 왔는데, 여러 명의 여자들 사이에 양복 입은 남자가 한 명 끼어 있으면, 그건 백 퍼센트 교회 모임이란다.

다음 세대 사역의 핵심은 어린이가 아니다. 청소년도 아니다. 다음 세대를 살리려면 그들의 가장을 살려야 한다. 가정 사역의 주체는 아내들이 아니다.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임을 가르치는 성경은 동시에 가정의 머리가 남편임도 가르치고 있다. 놀랍지 않은가? 적어도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가정의 머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가정의 머리는 남편이다. 그렇기에 그 머리가 성장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은 궁극적으로 그 가정 전체를 살리는 일이 된다. 


자녀가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법을
교회가 가르쳐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장을 살리고 그들을 세워줄 수 있을 것인가’가 우리에게 숙제로 남는다. 페스탈로치의 말처럼 첫째, ‘그 자녀가 자신의 부모에게 특별히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법’을 교회가 가르쳐야 한다. 내가 자녀 세대를 놓고 강의할 때 자녀들에게 특별히 힘주어 강조하는 바가 있다. “너희가 이 앞에 있는 내 말은 듣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너희 부모님께는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주님이 너희에게 원하시는 바다.” 그리고 아내들에게는 이렇게 가르친다. “여러분의 목사를 대하듯이 남편을 대하든가, 남편을 대하듯이 목사를 대하든가 둘 중 하나만 하십시오. 목회자에게는 순종하면서 왜 남편에게는 순종하지 못합니까? 자기 남편에게는 불친절하면서 왜 남의 남편에게는 친절합니까?”

교회 안의 아내들과 자녀들의 시선을 강단 위에 선 누군가에게서 그들의 남편과 아버지에게로 돌려줄 필요가 있다. 그것이 교회 안에서 권위를 가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남자들에게 가정과 교회를 위해
중요한 것을 결정하고 시행할 권한을!

둘째, 남자들에게 자신의 가정과 교회를 위해 무언가 중요한 것을 결정하고 시행할 권한을 주어야 한다. 아담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은 남자들에게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을 주셨다. 실로 세상의 모든 남자는 자기 집의 마당이라도 하나 다스리길 원한다. 그들도 세상에 나가면, 사장이고 교수고 직장 상사이다. 그들 나름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주체이다.

그런데 교회에만 가면 재미가 없다. 뭐든 가만히 듣고 앉아만 있어야지, 무언가를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실행할 일은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특별히 청장년 시절에 교회를 겉돈다. 예배에 나오는 시늉만 하다가 어거지로 자격을 갖춰서는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된다. 그렇게 젊은 시절 충분한 성장을 이루지 못한 채로 갑자기 당회원으로서 중요한 결정권을 갖는다. 그러니 본의 아니게 교회 일에 어깃장만 놓으며 거치는 돌이 되기 일쑤다. 슬픈 일이다.

교회는 온갖 지혜로운 방법을 총동원해 교회 안의 남자들에게 자기 가정을 다스리고 자신의 자녀들을 가르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사역자가 사역의 주인공이 되어 온 패턴을 버려야 한다. 가장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 사역자들은 그들의 무대가 되어 주면 충분하다. 그런 방향성의 일환으로 다운공동체 교회에서는 가장이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을 직접 가르치고 양육하는 “가족교회학교” 사역이 시작되었다.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가장을 자녀 교육의 확실한 주체로 만들어 주는 홈스쿨링 운동 역시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 개인적으로도 여섯 자녀를 홈스쿨링 하며 한 명의 가장으로서 필연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서 자녀들은 ‘가족을 본받아’ 자연스레 하나님을 찾고 만나 간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수신(修身)이 예수를 믿는 일이라면, 제가(齊家)는 가정을 믿음으로 세우는 일이다. 그다음이 치국(治國),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단계이며, 그 결과로 평천하(平天下),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일이 이뤄진다. 코로나 이전까지의 교회 사역은 수신에서 제가의 과정 없이 바로 치국으로 넘어가 헌신하길 요구하는 형국이었다. 그렇다 보니 사역의 기초가 약했다. 감사하게도 주님께서 이 코로나 시기를 통해 우리에게 ‘제가’라는 값진 단계를 알려 주고 계시다 본다.

교회들에게 익숙한 방향성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종교개혁의 후예가 아닌가? 자기(또는 자기에게 익숙한 무엇)를 부인하고 오직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기존 관성에 저항하며 개혁을 이루는 일이 우리의 프로테스탄트의 본성 아니던가? 가정의 에너지를 끌어들여 교회를 세우려고만 하지 말고, 가장을 세우는 데에 우리의 에너지를 과감하게 할애하자. 그럴 때 각 가정은 교회와 사역자들의 사랑과 희생에 감명하게 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들이’ 더 건강한 교회를 이루어 갈 것이라 확신한다.  

 

이송용 선교사
순리공동체홈스쿨 교장
전 몽골국제대학교 교수
전 몽골, 인도네시아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