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코로나에도 감사할 수 있을까?” 지난 추수감사주일 설교 제목이다. 감사주일이니 ‘감사’를 주제로 설교해야 하지만, 코로나 앞에 자신이 없었다. 내 안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질문이 있었다. ‘도대체 이 코로나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을까?’ ‘코로나 강풍을 맞고 있는 성도들에게 감사하라는 설교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지금 상황에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일종의 폭력이 아닐까?’ 도대체 코로나에도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
그러던 중에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된 청교도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400년 전 메이플라워(May flower)를 타고 미국에 도착한 청교도들이 맞은 첫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겨울을 나는 동안 47명이 죽고, 55명만 살아남았다. 힘들지만 용기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여름이 되자 가뭄이 들어 밭에 뿌려놓은 곡식이 타기 시작했다. 실망한 나머지 하늘을 쳐다보며 한탄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신사가 일어나 말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이 대륙에 건너온 사람들이 아닙니까? 이렇게 한탄만 하고 있을게 아니라 비를 달라고 기도합시다.”
이 말에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교회당에 모여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를 시작한 지 정확하게 열흘 만에 비가 내렸다. 말랐던 곡식이 다시 살아났다. 그해 가을, 풍작은 아니었지만 추수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제일 먼저 추수한 곡식을 가지고 교회에 모여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시작이다. 그러고 보면 청교도들도 한결같은 감사의 사람은 아니었다. 대단한 믿음으로, 온갖 어려움을 통과해서 신대륙까지 왔지만 가뭄이 지속될 때 그들도 낙심하고 한탄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감사의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기도 때문이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볼 때 비로소 감사할 수 있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3가지 뜻이 나온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나?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나? 마음먹으면 될까? 마음먹는 대로 된다면 무슨 고민이 있을까? 그런데 성경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비결을 알려준다. 가운데 있는 말씀이 중요하다. 그 말씀이 중심추이다. 쉬지 말고 기도할 때,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볼 때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그래서 수학공식처럼 감사 공식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고난이 기도를 만나면 감사를 낳는다(고난 + 기도 = 감사).
이 공식대로 산 사람이 바울이다. 바울은 고난을 당했을 때 솔직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고백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고후 1:8-9) 고난이 얼마나 심했으면 살 소망이 끊어졌다고 할까? 실제로 바울은 투옥, 매질, 파선, 강도, 위협, 추위, 배고픔의 극심한 고난을 당했다(고후 11:23-27).
그런데 바울은 고난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로해 주셨다고 고백한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그러면 어떻게 바울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었을까? 고린도후서 1장 9-10절에 그 이유가 나온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바울은 죽을 것 같은 육체적 어려움이 있을 때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다. 그는 극심한 고통의 순간에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으로 자신을 몰고 가신 이유는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사인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과거에 나를 위로하셨던 하나님께서 현재에도, 미래에도 위로해 주실 것을 기대했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다. 직장을 잃은 분들도 있다. 대부분의 사업장 매출이 곤두박질 쳤다.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어서 아우성이다. 교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 코로나 초기 일부 교회들의 미성숙한 대응과 언론의 집중포화로 교회의 신뢰도가 바닥을 치고 있다. 교회 안에 새 가족과 초신자들이 거의 사라졌다.
그런데 얻은 것도 있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자인지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라는 책에서 인간이 과학기술 발달에 힘입어 감염병을 이길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과거의 흑사병과 천연두부터 최근의 사스와 에볼라까지 각종 질병을 극복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조만간 인간이 영생불멸의 비법을 터득해서 신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예측했다. 그래서 책의 제목이 호모 데우스 즉, 신이 된 인간이다.
하지만 책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코로나가 터졌다. 이 작은 바이러스 때문에 호모 데우스를 외치던 인간은 지난 2년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고통을 겪고 있다. 전 세계가 코로나로 인해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있다. 신이 되는 인간이 아니라 도저히 신이 될 수 없는 인간을 경험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은 연약하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 바울이 코로나를 경험했다면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코로나가 지구촌 전체를 보이지 않는 철장에 가두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겸손해져야 한다. 눈을 들어 우리의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과거처럼 힘들 때만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상황이 호전되면 다시 빳빳하게 세워서는 안 된다. ‘이젠 됐다’ 싶어서 긴장의 끈을 살짝 풀었는데, ‘아직은 아닌 것’ 같다. 새해에도 계속 잠잠히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이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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