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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특별기고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한 선교사 이야기

 

호국 보훈의 달인 6월에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한 선교사의 가정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에는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 있습니다. 1890년 미북장로교 소속 의료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았던 J.W. 헤론(Heron 1850-1890)선교사가 전염병으로 소천하면서 묻히게 된 이후로 이 땅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헌신한 선교사들과 그들의 가족들 145명을 비롯하여 총 15개국 415명의 외국인들이 안장된 곳입니다. 그곳 ‘제 2 묘역 라-6’에 가면 우리 국군의 군목제도를 만드는데 산파 역할을 했던 숨은 공로자 윌리엄 얼 쇼(한국명 서위렴, William Earl Show 1890~1967)선교사와 그의 아내 아델린(Adeline H. Show 1895-1971)선교사, 그리고 그의 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 1922~1950)의 묘지가 있습니다. 
  

아버지 윌리엄 얼 쇼 선교사는 1890년 8월 22일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16년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를 졸업하고 컬럼비아대학원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하여 유럽 전선에서 군목으로 종군했는데 의무병으로 입대하여 군목으로 제대한 특별한 이력의 소유자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 컬럼비아대학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1921년 아내 아델린(1919년 결혼)과 함께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를 자원하여 우리나라에 옵니다. 감리회 소속으로 남편 윌리엄은 평양 광성학교에서, 아내 아델린은 숭덕학교에서 교육선교사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만주와 연해주 지방까지 다니며 선교 사역에 몰두하다 1938년에 제임스 무어(James Z. Moore) 와 함께 평양요한학교를 설립했고, 평양 보이스카우트 연맹 단장으로도 활동했습니다. 
  

그러던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돼 잠시 필리핀에서 활동하다가 해방 후 1947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한국을 누구보다 사랑했고 한국인들에 대해 잘 알았던 그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주한미군 군목으로 자원입대하여 종군합니다. 당시 연합군의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일반인들로부터 용공 분자들을 구분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윌리엄 얼 쇼 목사는 피난민들이 용공 분자로 몰려 학살되는 일이 없도록 힘썼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대한민국 국군에도 군목사역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피난 시절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군목제도의 중요성을 수차례 역설하여 결국 승낙을 받게 됩니다. 그러던 중에 해군 대위로 자원입대하여 인천으로 상륙해 서울 탈환 작전에도 참여하고 있던 외아들 해밀턴이 녹번리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됩니다. 슬픔에 잠긴 아버지는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아들을 양화진에 묻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도 아들 해밀턴 대위의 전사를 애도하는 물결이 일어나 5925명의 사람들이 1만 4500달러를 모금해 아버지에게 보냈는데, 아버지는 그것을 현재 목원대학교의 전신인 대전감리교신학원에 기부하였고 학교 측은 이 모금액으로 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를 기념하는 기념 채플과 한국 목회자들의 재교육을 위해 목자관을 건립하였습니다. 윌리엄 얼 쇼 선교사는 전후에도 계속 한국에 남아 목원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며 인재양성에 힘썼고, 1961년 은퇴 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1967년 10월 5일 캘리포니아 스탠퍼드 병원에서 78세의 나이로 소천하게 됩니다. 그의 유해는 생전에 유언을 따라 양화진에 먼저 묻혀 있는 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 옆에 안장되었습니다.
 

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는 그의 아버지가 한국에 들어온 이듬해인 1922년 6월 5일에 평양에서 출생했습니다. 고등학교까지 한국에서 자라난 그는 1939년 미국으로 건너가 아버지의 모교인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1943년 졸업 후 해군 장교에 지원한 그는 1944년 1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독일군 함대의 이동 상황과 해안 정찰 등 특수임무를 수행했는데, 이 공로로 미 정부로부터 퍼플 하트(Purple Heart) 메달을 받을 정도로 인정받는 유능한 장교였습니다. 1946년 9월 1일 해군 중위로 제대한 그는 이후 미 군정으로부터 한국에서 활동해 줄 것을 요청받게 됩니다.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 평양 사투리를 구수하게 구사할 정도이며 한국의 실정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미 군정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1947년 다시 한국 땅을 밟게 됩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해양경비대 사관학교에서 항해술과 함정 운항술 민간인 교관으로 활동하며 초기 해군 간부들을 교육해 대한민국의 해군의 태동기를 이끌었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기에는 경제협력청(ECA) 관리로 일하면서 미국의 원조를 이끌어내 대한민국의 탄생과 새로운 정부 수립에도 기여했다. 
  

이후 극동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그 분야의 전문가가 돼 한국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하버드대학 박사과정에 진학해 동아시아 연구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연구에 전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해군 대위로 자원하여 재입대를 하게 되고 세 번째 우리 땅을 밟게 됩니다. 

그는 이전에 한국에서 근무할 당시 한국 해안에 매설된 기뢰 제거작업을 지도한 실전 경험자였고, 또 한국 해안 경비 상황과 지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미군 장교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 경력으로 인해 그는 인천상륙작전 계획팀의 특별참모로 임명돼 맥아더 장군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며, 여러 가지 전장 상황상 성공 가능성이 1/5000이라고 했던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기여하게 됩니다. 작전 성공 후 미 해병대는 서울로 진격했는데, 당시 미군의 최대 문제는 공산군과 일반인을 구별할 수 있는 인원이 사실상 전무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평양 사투리를 사용하는 해밀턴 대위는 미 해병 5연대에 배속이 되어 서울 탈환 작전에 참여하였고 최전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일반인들과 공산군을 구별하는 위험한 일에 자원하여 김포반도, 행주산성, 신촌 노고산 전투를 승리를 견인합니다. 그러던 9월 22일 임무를 수행 중 녹번리 부근에서 숲속에 매복하고 있던 적의 흉탄에 전사합니다. 그의 나이 29세. 그는 김포공항 근처에 가매장됐다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버지에게 인계돼 서울 수복 후인 9월 28일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한국을 한국인보다 더 사랑했던 아버지 윌리엄 얼 쇼 선교사와 자신의 사랑하는 친구인 한국을 위해 생명을 바친 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부자... 한국전쟁에 자원입대하는 아들을 걱정하던 부모에게 해밀턴 대위는 1950년 6월 “아버지, 어머니! 지금 한국인들은 전쟁 중에 자유를 지키려고 분투하고 있는데 만약 제가 이를 도우려 흔쾌히 가지 않고 전쟁 후 평화시에 선교사로 돌아가려 한다면 그것은 제 양심상 도저히 허락되지 않는 일입니다.”라는 편지를 쓰고 한국전쟁에 참여합니다. 또한 전사하기 1주일 전, 인천상륙작전에 함께 했던 당시 한국 해군 PC-703호 함장 이성호 중령(이후 제5대 해군참모총장 역임)과의 대화에서 “나도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한국사람입니다. 내 조국에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하게 공부만 하고 있겠어요. 내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공부해도 늦지 않아요.”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녹번리 전투에서, 한국 땅에서 30년간 활동한 선교사 아들의 전사 6주년이었던 1956년 9월 22일 해밀턴 대위가 전사한 곳에 친지들에 의해 전사기념비가 건립되었습니다. 비문에는 그로 하여금 한국전쟁참전을 결심하도록 도전했던 요한복음 15장 13절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는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후 2001년 10월 20일 해밀턴대위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해군사관학교 2기생들에 의해 ‘숭고한 한국 사랑과 거룩한 희생을 추모하며’라고 새겨진 좌대석이 더해졌고, 6·25전쟁 60주년인 2010년 6월 22일에는 은평구 녹번동 은평 평화공원이 조성되어 그곳에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동상이 세워집니다. 또 2014년에는 해군사관학교에, 작년인 2018년 9월 20일 그의 아버지 윌리엄 얼 쇼 선교사에 의해 건립된 대학 채플에 그의 흉상이 건립되었습니다. 
  

이 가문의 한국사랑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들 해밀턴 쇼 대위의 젊은 미망인 주아니타(Juanita Robinson Show, 한국명 서화순)선교사는 1956년 두 아들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 외국인학교 교사로 봉직하였고 1963년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를 지내며 세브란스병원에 의료사회봉사학과를 신설하는데 기여하였고 지금은 공직에서 은퇴한 후 오하오주에서 머물고 있으며 양화진의 남편묘역에 예약이 되어 있습니다. 대위의 장남인 윌리엄 로빈슨 쇼(William Robinson Show)는 서울대학교 법대 초빙교수로 재직한 바 있으며, 그의 아내 캐롤 쇼(Carole Cameron Show)는 작가로 미 한국대사관 기록보관소에서 근무하면서 한국 근대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된 ‘The Foreign Destruction of Korea Independence’를 출간했습니다. 대위의 손녀 줄리는 1990~1991년 오산의 공군기지에서 장교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반도에서 살면서도 오늘 누리고 있는 번영에 사로잡혀서 우리의 평화와 자유가 어떻게 지금까지 지켜져 왔는가에 대해 무감각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조국의 광복과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헌신하신 분들, 한강의 기적을 열기 위해 밤낮없이 뛰었던 이들, 그리고 조국을 위해 늘 깨어 눈물로 부르짖었던 한국 교회와 성도들의 기도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윌리엄 얼 쇼 선교사의 가문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하심에 순종하여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였던 이들의 헌신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기억(Think)하는 사람만이 감사(Thank)합니다. 감사가 살아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오늘을 감당할 힘과 내일을 바라볼 소망을 함께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호상 군종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