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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다음세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의 도입부이다.


  누군가를 꽃피게 하는 것은 뭔가 큰 돈을 들이거나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다. 그를 한 명의 소중한 ‘존재’로 대해주는 것이다.


  이 시대의 다음세대들은 ‘숫자’가 되어버렸다. 그들이 어린 시절부터 어떤 환경 가운데 자라왔는지, 그들의 가슴 속에는 어떤 꿈이 있는지, 세상은 그다지 관심이 없다. 오직 그들이 성취한 숫자로 그들을 평가할 뿐이다. 몇 등인지, 몇 등급인지, 학점은 몇 점인지, 자격증은 몇 개인지, 봉사활동은 몇 시간 했는지...


  그러다보니 사회와 기성세대가 요구하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다음세대들은 자기 스스로를 일찍 포기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이 훨씬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을 말하면서 자신의 인생에 쉼표가 아닌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이것이 지극히 능력 중심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다음세대들의 아픔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안전지대일까? 교회는 다음세대들이 ‘숫자’가 되지 않고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환영받고 존중받는 곳일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의 다음세대들은 세상이 아닌 교회에서도 존재가 아닌 숫자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일까? 다음세대 부서의 교역자들과 교사들의 관심이 우리 부서 우리 반의 한 학생이 한 주동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삶 자체’에 관심이 있기보다는, 주일날 ‘예배에 출석했는지, 오늘 출석 인원에 포함되었는지’에 더 관심이 있다면, 미안하지만 그 학생은 그곳에서도 존재보다는 숫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늘 교사로부터 연락이 올 때마다 듣는 질문이 “내일 교회 올거지?” 밖에 없고, 교역자가 밥을 사주는 등의 호의를 베푸는 이유와 목적이 “교회에 와라.”는 조건 때문이라면 아이들은 교회에서도 숫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 펜데믹을 경험한 지난 1년 6개월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 사실과 정면으로 충돌해버렸다. 그것은 한국 교회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숫자’가 해체되었다는 것이다. 수적 성장 위주로 앞만 바라보고 달려왔고 교육부서도 어떡하든지 숫자를 늘리는 것이 부흥이라고 생각했는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로 인해서 우리는 수백 수천 명이 모이는 예배당에도 20명도 모이지 못하는 현실을 직면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과하면서 평소 교역자나 교사와 인격적인 라포가 형성되어있지 않고 기계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던 수많은 다음세대들이 교회를 떠났고 신앙에서 멀어졌다. “교회 올거지?”라는 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라도 우리는 ‘숫자’가 아닌 ‘존재’에 집중해야 한다. 일주일동안 아이들의 삶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고,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 한번 하지 않고도, 주일날 우리 부서 우리 반 아이들이 많이 오면 내가 할 역할을 다한 것처럼 만족할 것이 아니라, 주중에도 우리의 시선과 마음과 발걸음이 아이들의 삶을 향해야 한다. 이제는 ‘교회 올거지?’를 물을 것이 아니라, ‘잘 지내니?’, ‘요즘 시험기간이라 많이 힘들지?’하며 그들의 삶을 궁금해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신 목적이 전도하고 귀신을 내어쫓는 기능적인 역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와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였듯이, 아이들의 숫자와 기능보다는 존재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존재 자체만으로도 소중히 대할 때, 그들은 다른세대가 아닌 다음세대로서 우리의 신앙의 바통을 이어받아 나갈 것이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마가복음 3: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