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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신앙에세이

43년 전 어느 날의 약속

 

  봄과 여름 사이에 곱게 자리한 싱그러운 오월이었다. 때 묻지 않은 푸른 잎 새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상쾌하면서 생동감 있는 봄의 정취는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토요일 오후였다. 거실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에 아기자기한 놀이터와 작은 공원이 있었다. 재잘재잘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쟁그럽게 창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끌려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뛰어노는 여자아이들의 모습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고, 먼빛 속에서도 흐뭇해하는 엄마들의 미소가 한 폭의 그림처럼 내 가슴으로 파문이며 왔다. 다소 거칠게 뛰어노는 남자아이들에게 손사래를 치면서도 엄마들은 모두 행복이 넘쳐나 보였다. 한들거리는 바람에 연초록 잎새는 그네를 타는 듯했고, 난만한 화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가는 오월이 공원……. 이를 연출하는 아이들의 음악회는 고대로부터 현대를 거쳐 미래에도 계속될 지구상의 ‘오랜 무대’일 것이다. 


  한참 동안 정신없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모자는 비스듬히 쓰고 하복 상의를 흔들며 기분 좋게 들어서고 있다. 한참 식욕이 왕성한 때라 아들은 라면 하나와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얼른 제방에 들어가 TV 앞에 앉는다. 


  그 시절엔 흑백 티브이 한 대로 온 가족이 같이 봐야 했는데, 유독 이 녀석은 AFKN을 봐야 한단다. 그 방송에서만 미식축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란다. 라이브 방송이라고 채널을 고정해 놓으면 가족들은 난감해했다. 모두 자야 하는 밤중에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방송을 보려 하니 어쩔 수 없이 JVC 작은 TV를 사 주어야 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보도록 하고 평일에는 장롱 속에 넣어서 잠가두곤 했는데 기다리던 AFKN 방송을 볼 수 있는 토요일이니 얼마나 신이 났을까? 


  마침 그때 고1 누이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늦은 점심을 먹는 누이 앞에 마주 앉더니 
  “누나, 누나는 왜 맛있는 반찬은 안 먹고 오이지 하고 만 밥을 먹어?”
  “응 나는 오이지가 깔끔하고 맛이 있는데?”
  이렇게 식탁에서 먹방 한담을 나누던 아들은 무슨 생각이라도 난 듯이 나를 쳐다보며 “엄마” 하고 불렀다. 


  그리고 느닷없이 “내가 있잖아, 커서 어른이 되면 엄마한테 BMW 차 한 대 사드릴게. 그리고 내 색시가 엄마한테 잘못하면 그냥 안둘껴.” 하며 두 주먹으로 훅을 날리는 시늉을 해서 나는 무슨 소리냐고 하며 껄껄 웃었다. 
  “얘얘. 아내는 때리면 안 되는 거야.”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나는 기분이 좋았다.


  딸아이도 한 말 거들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엄마 생일이 되면 좋아하시는 단감 한 상자씩 사드려야 하겠네.”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냉장 시설이 변변치 않을 때라 단감을 다음 해 봄까지 저장해 둔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지만, 딸은 어떤 방법으로든 약속을 꼭 지킬 거라고 했었다. 


  그렇게 남매가 주고받으며 약속을 했던 때가 1978년 오월이었으니, 43년 전 일이다.  그때 국내에선 포니 자동차가 생산 중이었고,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서는 유전이 발굴된다고 연일 신문, 방송에서 시추선 이야기가 떠들썩했던 때였다. 우리도 산유국이 될 수 있다며 국민들은 희망에 차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를 남기고 조금씩 멀어져가던 그 시절, 그러나 사람들은 마이카 시대가 온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라며 경제 논리에 밝은 사람들은 이럴 때 주식을 사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1주에 5,000원이니 월급을 털어서라도 사야 한다고. 그 말은 맞았다. 그런데 그분들은 아직 큰 부자가 되지 못했으니 아이러니하다. 이렇게 모든 이슈가 자동차에 대한 얘기나 흑백 TV가 컬러로 바뀐다는 얘기로 끊이지 않는 국민들의 화제가 되었다. 


  그래서 중학생인 아들이 차에 관심이 많았나 보다. 하긴 그때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자동차에 명운을 걸기도 하지만 느닷없이 엄마에게 외제 고급 차를 사주겠다는 아들 녀석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냥 어미 기분 좋아지라고 불쑥 한 말일 수도 있으니까.  수많은 계절이 오고 갔다. 학업을 마치고, 군 복무를 마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붕어빵 같은 두 아들의 아비가 되었다. 3년 전에 교회의 장로가 되더니, 내년에는 며느리를 본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아들이 찾아와서는 벙글거리며 통장을 불쑥 꺼내놓았다. 
  “엄마, 38년 전 약속 기억하세요?”
  “38년 전 약속?”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BMW요.” 한다. 사람의 기억은 참으로 묘하다. 말끝의 실마리가 잡히면 수십 년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아~ 그때 그 약속.


  아들은 약속을 지키려고 마음으로 저축을 해왔나 보다. 남편은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더니 모자지간의 미담에 초를 쳤다. 
  그 후 5년이란 세월이 또 흘렀다. 나는 다시 남편에게 아들의 약속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여보, 더러 성공한 아들이 엄마에게 차를 사준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우리는 경우가 다르지 않아요? 14살짜리 중학생 아들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와 한 약속인데 거절한다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내 차도 11년 넘게 탔으면 많이 탔는데 이번 기회에 모자간의 귀한 약속을 지키도록 방해하지 말아 주셔요.”


  구구한 설명을 했다. 몇 주가 흐르고 어렵게 어렵게 남편의 이해를 얻어냈다. 그리고 3개월 뒤 차를 선물로 받았다. 요즘 벤츠와 친하게 지낸다며 아들이 선택해준 차는 자그마하면서도 탄탄한 하이브리드 SUV 벤츠였다. 


  나는 43년 만에 약속을 지켜준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인생의 서툰 것도 다듬어가며 산다는 목공예를 좋아하는 하늘 목수! 

오랜 약속 지키느라 애썼어. 큰돈 썼네. 

약속을 날려버리지 않아서 고맙고, 훅 맞고 혼이 났다는 기별이 없어서 고맙고, 

“어머니 풀옵션하세요” 하던 며느리의 전화가 고맙다. 

“BMW와 단감 한 상자.” 

내게는 보석보다 더 빛나는 너희들의 약속이었다.”


이정선 권사
강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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