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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특별기고

부활절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부/활/절/특/집

 

 

성탄절보다 오랜 역사를 지닌 부활절
3세기 이후 교회적 관습으로 계승


  예수님의 부활은 가장 신비로운 사건이며 교회가 지키는 가장 소중한 절기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키는 부활절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초대교회에서부터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이 성탄절보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부활절은 교회가 지키는 중요한 절기이지만 부활절의 유래나 역사에 대해서는 모르는 분이 많다. 그래서 이 점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교회가 언제부터 일 년 중 어느 특정한 날을 정하여 부활절로 지켜왔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적어도 3세기 이전에는 이에 대한 분명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또 신약성경에서 부활절을 교회적 절기로 지키며 축일(祝日)로 삼았다는 증거도 없다. 단지 초대교회는 유월절을 기념하는 절기 혹은 행사를 지켰던 흔적만이 있을 뿐이다.


  부활절을 영어로는 이스터(Easter)라고 하지만 희랍어로 파스카(Pascha)라고 하는데, 이 말이 ‘고난을 당하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동사 파스케인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고, ‘넘어가다’(유월, 유월절)를 뜻하는 히브리어 동사 페사흐(Pesah)에서 유래했다. 이 점은 부활절은 사도시대 교회가 행하던 유월절 지킴에서 발전해 온 것임을 암시해 준다. 유대주의 영향을 받은 소아시아의 초기 신자들에게 있어서 유월절은 영원한 규례(출12:14)였기 때문에 신약교회가 계속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날을 ‘파스카 스타우로시몬’(pascha staurosimon, 본 유월절), 부활을 기념하는 날을 ‘파스카 아나스타시몬(pascha anastasimon)라고 불렀는데 후에는 이를 ’부활절‘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부활절을 유월절에 해당하는 날을 지키는 것이 좋다고 여겼다. 이 당시 유월절은 유대력(曆) 니산원(태양력으로 3-4개월에 해당) 14일이기 때문에 이 날을 부활절로 고수했다. 이 점을 주장하는 이들을 ‘14일파’(Quartrodecimans)라고 부른다. 이때에는 금식과 묵상을 중시하고, 유월절을 전후한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의 사역을 회상하고 그 과정을 재현하는 의식을 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날은 반드시 주일이 아니었고 또 모든 이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반면에 서방의 로마에서는 소아시아의 교회처럼 나름대로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면서 예수님께서 실제로 죽임을 당하신 금요일에 죽으심을 기념했고, 음력 3월 보름 다음에 오는 주일을 부활절로 기념했다. 이처럼 부활절을 어느 날로 지킬 것인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모든 교회가 해마다 부활절을 지켜야 한다는 규정은 없었다. 

 

사진=Pixabay


  그러면 부활을 교회의 축일로 지키는 풍습을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이점에 대해서 300년 이후에야 분명한 기록이 있지만, 현재 밝혀진 가장 오래된 증거는 178년 리용(Lyon)의 감독이었던 이레니우스(Irenaeus)의 기록이다. 그에 의하면 2세기로부터 부활절이 연중행사로 지켜져 왔고, 2세기 말 로마 감독 빅토리우스 1세(Victorius Ⅰ, 189?-199?)는 온 세계가 로마교회가 정한 바에 따라 주일날에 부활절을 지키도록 호소하였다고 한다. 유대인 트리포(Trypho)는 기독교인들이 유대절기들이나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했는데, 이 점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특정한 날을 교회적 절기로 지키는 것이 공식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Justin Martyr, Trypho, X). 그러다가 3세기 이후 교회가 오늘날과 같이 부활을 기념하는 교회적 관습을 계승해 온 것으로 보인다. 특히 300년경을 경과하면서 부활을 기념하는 어느 한 날이 교회적 축일로 지켜진 것으로 보인다. 나시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 329-389)는 이 날을 ‘날들 중에 가장 고귀한 날’로 칭했고, 로마 감독 레오 1세(Leo Ⅰ)는 부활의 날은 ‘위대한 날’로 지칭되었다. 그러나 부활절을 어느 날에 지킬 것인가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었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동방교회는 유대교의 유월절(그날이 금요일이든 아니든)을 따라 일 년 중 첫 달인 니산월 14일을 고수했으나, 서방교회는 음력 3월 보름 다음에 오는 주일을 주장했다. 동방의 소아시아 교회는 유대교로 회기하지 않는 채 정해진 날에 절기를 지킴으로써 부활절 날자가 변동되지 않는 장점이 있지만, 서방의 로마의 교회는 자유와 지혜로운 변화의 원리를 따르고 있었다. 동방 지역이 주의 죽으심을 강조한다면 서방은 주의 부활을 강조하는 성격이 있다. 이런 상태에서 어느 날을 부활절로 지킬 것인가를 둘러싼 부활절 논쟁이 일어난다. 이 논쟁을 ‘부활절 논쟁’(Paschal controversies)이라고 부른다. 


  복잡한 논쟁이 있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서방의 입장이 지지를 얻었고, 결국 이 문제는 325년 니케아회의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 회의에서는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교회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교회와 부활절의 날짜를 정하는 일에 공식적인 합의를 보았다. 이때 합의된 부활절은 일요일이어야 하지만 어느 특정한 주일로 고정할 필요는 없다고 하여, 춘분(春分, 3월 21일경) 후의 최초의 만월(滿月) 다음에 오는 첫 주일을 부활절 주일로 지키기로 합의하였다. 그래서 3월 22일부터 4월 25일 사이의 어느 한 주일이 부활주일로 지켜지게 된 것이다. 결국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교회의 입장이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합의한 바에 따르면 부활절은 이르면 3월 22일, 늦으면 4월 25일에 오지만 구체적인 날자 결정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에게 위임하였다. 그런데 서방교회는 그가 결정한 날을 부활절로 지키지 않음으로서 실제적으로는 동․서방교회가 동일한 날을 부활절로 지키지 못했다. 서방교회는 동방지역인 알렉산드리아 감독의 부활절 결정에 불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인들은 춘분을 3월 21일로 잡았으나, 로마인들은 3월 18일로 산정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3월 21일에, 혹은 4월 25일에, 그리고 다른 교회는 그 양 기간 중 어느 날을 지키기도 했다. 부활절을 산정(算定)하는 방식은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의 이래로 오늘날까지 지켜 오고 있으나 이러한 약간의 불일치 때문에 오랜 논의와 중재를 거쳐 525년 동․서교회가 사용하는 역산법을 일치하도록 조정함으로써 비로소 동․서교회가 다 같이 한 날을 부활절로 지키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1583년 그레고리우스 13세 때 달력을 바꾸었는데, 이를 그레고리우스력(Gregorian calendar)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현재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양력(陽歷)인데, 이 력(曆)에 따라 부활절을 지키고 있다. 반면에 동방교회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6년에 제정한 율리우스력을 고수하고 그레고리우스력을 배척하고 있다. 그래서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와 다른 날짜에 부활절을 지키고 있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동방교회는 황제력인 율리우스력을, 서방교회는 교황력인 그레고리우스력을 따르는 역산법(曆算法)의 차이 때문에 각기 다른 부활절을 지키게 된 것이다.


   이상을 정리하면, 적어도 3세기 이전에는 오늘 우리가 지키는 것과 같은 의미의 부활절은 없었다. 단지 유대교적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유월절 행사가 있었고, 이 절기가 점차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로 변모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300년을 경과해 가면서 일 년 중 어느 한 날을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로 지키게 되었고, 325년 니케아회의를 거치면서 어느 특정한 날을 부활주일로 지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때 정해진 역산법에 따라 오늘 날에도 부활주일을 정하고 교회적 축일로 지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역산법의 차이 때문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각기 다른 부활절 날짜를 따르게 되었다.   

 

이상규 교수
고신대학교 명예교수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이 주제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이상규, 『역사의 거울로 본 교회 신학 기독교』(생명의 양식, 2020)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