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369장 ‘죄 짐 맡은 우리 구주’를 묵상하며...>
살다 보면 이유 없이 마음이 무거워지는 날이 있습니다. 특별히 큰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하루의 끝에 이르면 알 수 없는 피로와 함께 설명하기 어려운 짐이 가슴에 내려앉습니다. 우리는 그 무게를 ‘스트레스’라고 부르기도 하고, ‘책임’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어떤 짐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짐은 대부분 혼자 지고 있을 때 더 무겁게 느껴집니다. 이럴 때 제가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찬송가 369장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입니다. 이 찬송은 단순한 위로의 노래가 아니라 한 사람의 깊은 눈물에서 시작된 고백입니다.
이 찬송의 작사자는 아일랜드 출신의 신실한 평신도 신자였던 조셉 메드릭 스크리븐(Joseph Medlicott Scriven)입니다. 그는 목회자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스크리븐은 사랑하는 약혼녀와 결혼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믿기 힘든 비극을 겪게 됩니다.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약혼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그날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고, 그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와 질문이 남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가?” 그는 그 아픔을 안고 캐나다로 이주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가난한 이웃들을 섬기며 조용히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또 한 번의 상처가 찾아옵니다. 다시 사랑하게 된 여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두 번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그의 인생은 인간적으로 보면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병든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한 편의 시를 씁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글이었습니다. 그 글의 내용은 단순했습니다.
“어머니, 우리가 이 땅에서 겪는 모든 슬픔과 짐을, 주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시가 오늘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369장의 가사가 되었습니다. 이 찬송은 신학적인 논문이 아니라 눈물로 써 내려간 고백입니다.
그래서 이 찬송은 듣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까지 닿습니다. 왜냐하면 이 노래는 고통을 모르는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붙든 사람이 쓴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찬송에 곡을 붙인 사람은 찰스 크로자트 컨버스(Charles Crozat Converse)입니다. 그는 미국의 작곡가이자 변호사였는데, 단순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선율로 이 가사를 더욱 널리 퍼지게 했습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친근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찬송은 세대를 넘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 찬송의 중심 메시지는 매우 분명합니다. “우리에게 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짐을 맡길 분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정도는 내가 감당해야지.” 그래서 기도도 미루고, 마음 깊은 곳에 짐을 쌓아 둡니다. 하지만 그 짐은 시간이 지나도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무겁게 우리를 짓누릅니다. 우리의 문제는 짐이 많다는 데 있지 않고, 그 짐을 맡기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찬송은 우리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이 질문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초대입니다. 기도는 문제를 즉시 해결해 주는 마법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도는 분명히 우리의 짐을 함께 지시는 분과 우리를 연결시켜 줍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 찬송이 특별한 이유는 예수님을 단순히 ‘주님’이나 ‘구원자’로만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고백한다는 데 있습니다. “어찌 좋은 친군지…”
신앙이 관계라는 사실을 이보다 더 따뜻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친구란, 기쁠 때 함께 웃어 주고, 슬플 때 말없이 곁에 있어 주는 존재입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라는 사실은 신앙을 더욱 따뜻하고 살아 있는 관계로 만들어 줍니다. 저는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평안은 문제가 사라져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고, 여전히 감당해야 할 현실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혼자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걷는다면 그 순간부터 삶의 무게는 달라집니다. 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짐을 지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 길을 여는 문입니다.
하루의 시작에서 “주님, 오늘도 함께 걸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하루의 끝에서 “주님, 오늘도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이 단순한 기도가 우리의 삶을 평안으로 이끕니다.
스크리븐이 두 번의 아픔을 겪고도 이 찬송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슬픔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슬픔을 함께 나눌 ‘친구 되신 주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무너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신앙으로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고,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강해서가 아니라 우리 곁에 끝까지 함께하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혹시 마음이 무겁다면 이 찬송을 조용히 불러 보십시오.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그 고백이 입술을 넘어 마음에 닿을 때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이미 우리의 삶 속에는 우리의 짐을 함께 지시며 우리를 평안으로 이끄시는 가장 좋은 친구가 함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분과 함께 걷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복되고 평안한 삶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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