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둘째 은송이가 동생과 장난치다가 의자 모서리에 부딪쳤다. 보니 오른쪽 눈꺼풀에 상처가 났다. 병원에 가니 꿰매야 한다고 했다. 그 조그만 눈에, 얇디얇은 눈꺼풀에 꿰매야 할 정도의 상처가 났으니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이도 어리고 눈꺼풀이라 수면 마취를 하고 꿰맸다. 정말 다행인 것은 절묘하게 쌍꺼풀 라인을 따라 상처가 나서 대여섯 바늘을 꿰맸는데도 많이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엄마는 너무 속상해했다. 자책하기도 하고, 괜히 아이들에게 이제부터 위험하게 놀지 말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한동안 아이들이 조금만 휘청해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은송아, 너는 평생 왼쪽 오른쪽 헷갈릴 일은 없겠다.”
나는 어릴 적부터 그렇게 왼쪽 오른쪽이 헷갈렸다. 하루는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졌는데 손바닥에 조그만 돌멩이가 박혀 결국 꿰매게 되었다. 그 상처 때문에 한동안 고생했지만, 그때부터 나는 방향이 헷갈릴 때마다 손바닥의 흉터를 만지는 습관이 생겼다. 왼손을 다쳤으니 상처가 있는 쪽이 왼쪽이다. 시간이 지나 상처는 희미해졌지만, 나는 아직도 가끔 손바닥을 만지며 왼쪽, 왼쪽 하곤 한다. 상처는 아물었지만 상처의 기억은 내 삶에서 방향을 알려주는 표시로 남아 있다.
우리는 누구나 상처를 가지고 있고, 상처는 아픔의 기억을 담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상처가 있는 자리에서 자라지 못한 채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상처를 감추고 덮어두려고 한다. 그리고 더 상처받지 않기 위해 비슷한 상황을 피하거나 멈추는 방법을 선택한다. 아니 선택하기도 전에 비슷한 상황만 와도 이유 없이 두려워지고, 이유 없이 예민해지고, 이유 없이 뒤로 물러서게 된다. 상처가 정지 신호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 다칠 수는 없다. 아무리 조심해도 원치 않는 일은 일어난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을 붙잡고 멈춰 설 수는 없다. 오늘도 우리는 걸어가야 하기에 상처를 정지 신호가 아닌 이정표로 삼아야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의 이야기다. 둘째 날부터 발바닥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일주일쯤 지나자 걸을 때마다 엄지발가락과 뒤꿈치가 쪼개지는 것 같은 고통이 있었다. 걷다 보면 조금 나아지는 듯하다가도, 잠시 쉬었다 다시 걸으려 하면 고통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되었다.
그때마다 도반들이 권하는 파스며 진통제를 나는 “고통도 함께 걷는 친구인데 내쫓을 수 없다” 하며 거절했다. 참 허세 가득한 말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발바닥의 고통은 한 달의 여정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발바닥의 아픔은 오히려 아무리 아파도 내일 걷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는 확신의 근거가 되었다. 거기에 더하여 남은 시간의 일정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아픔이 나를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를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가지 일을 해 나가다 보면 생각지 못한 순간에 멈칫하게 될 때가 있다. 알지 못하는 이유로 브레이크가 걸리고, 사소한 일에 괜히 마음이 예민해질 때가 있다. 처음에는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대부분 과거의 상처와 연결된 순간이었다. 그때의 아픔, 그때의 실패, 그때의 서운함이 비슷한 상황을 만나 우리를 멈춰 세웠던 것이다. 모를 때는 당황해서 멈췄지만, 알게 된 후에도 괜히 상처를 건드리기 싫어 덮어버리곤 했다. 그러나 이렇게 같은 자리에서 계속 멈추게 된다면 겉으로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지만 언제나 여전히 자라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래서 교회 역시 상처를 덮어두는 공동체가 아니라, 상처를 통해 방향을 배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의심하는 도마에게 손의 상처와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주시고 만져보게 하셨다. 부활하셨다면 상처도 사라질 수 있었을 텐데, 예수님의 몸에는 상처가 남아 있었다. 그 상처는 죽음의 흔적이 아니라 부활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 상처는 도마와 교회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 상처를 만진 도마는 다시 믿게 되었고, 두려움에 멈추어 있던 제자들은 다시 길을 나서게 되었고, 교회는 그 상처를 바라보며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상처는 실패의 표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가시는지를 보여주는 표시가 되었다.
지금 우리는 고난주간을 지나 부활절로 나아가는 시간 속에 있다. 어떻게 보면 고난주간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시간과도 같다. 예수님의 고난을 바라보며 우리는 우리의 아픔과 상처를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나 고난주간은 우리를 멈추게 하는 시간이 아니라 다시 길을 보게 하는 시간이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상처가 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우리의 삶에서 이정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를 가장 분명하게 이끌어 가는 이정표는 우리의 상처가 아니라 예수님의 상처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남아 있던 못 자국과 창 자국은 실패의 흔적이 아니라 사랑의 흔적이었고, 죽음의 흔적이 아니라 생명의 흔적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상처만 바라보며 멈추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상처를 바라보며 다시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고난주간은 우리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고, 부활절은 예수님의 상처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시간이다. 우리의 상처가 이정표가 되고, 예수님의 상처가 길이 된다. 우리는 그 상처를 따라, 고난을 지나 부활로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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