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은 아직 어둠이 머무는 땅,
흔들리고 진동하는 땅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의 확실한 소망의 근거이다.”
해마다 돌아오는 부활절. 도대체 주님의 부활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교회는 왜 이토록 부활을 강조해 온 것일까? 우리는 매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으로 부활에 대해 고백한다. 부활을 일러, 타 종교와 섞일 수 없는 가장 기묘한 일이요, 기독교의 근간이라고들 말한다. 왜 그렇게 부활이 나에게도 죽고 사는 문제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몸의 부활은 기독교만이 가지는 특별한 사건이다. 주님의 몸은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모든 성도들은 남김없이 주님처럼 몸의 부활에 참여할 것이다. 성경은 죽을 몸도 다시 살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죽음과 생명은 반대이다. 전복이다. 부활은 죽음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변화 중에 가장 큰 변화이다. 십자가가 절멸이라면, 부활은 승리요, 완성이다. 죽음과 생명의 변증법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머무는 기적이다. 참 사람이요, 참 하나님이신 한 분 그리스도에게서만 일어난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인류역사 중 이런 일은 없었다. 부활은 강조하다 못해 불러야 할 가장 큰 노래이다.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다. 사망의 짙은 어둠 속, 하나님의 진노 아래 남았을 것이다. 여전히 죽은 자로 어둠 아래 살고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생명의 기초이다. 교회의 토대이다. 우리 필생의 강조요, 사활적 교리이다. 우리 소망의 뿌리요, 의로움의 근거이다.
주님은 공생애 중에 반복해서 부활을 예고하셨다(마16:21; 20:19). 자신의 육체를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실 것이라고(요2:19-21), 생명을 버릴 권세도, 생명을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요10:18),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요11:25) 말씀하셨다. 주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행26:33),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15:20). 죽은 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나신 분이 되셨고(골1:18), 많은 형제들 중에 첫째가 되셨다(롬8:9).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우리의 구원이고 생명이다.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 17주일 45문답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성취하신 의에 우리도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둘째,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이미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였다고 이야기한다.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영광스러운 우리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라고 말한다.
고린도전서15:42-43절에서 “썩을 것을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부활의 주께 속해 있다. 산 자가 되었고, 의로운 자가 되었다. 아직 완성에 이르지 못했으나, 우리는 겨자씨(마4:30-32)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발효 속에 누룩처럼 부풀어 가고 있지 않은가(마13:33).
우리는 많이 운다. 약해서도 울고, 억울한 일이 많아서도 울먹인다. 선이 악에 압도되는 일로 마음이 상한다. 어둠과 죄악의 세력은 시퍼렇게 살아있다. 의인이 애매하게 고난당하는 일을 목도한다. 자주 나는 병으로 몸도 괴롭고, 세월의 무게 속에 육체도 속절없이 시간과 중력의 법칙에 따라 무너진다. 그렇지만 안다. 악은 완전한 멸망 때까지 맹렬하게 저항하겠지만, 승리를 결코 막아서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주님께서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에 말이다.
미래를 확신하는 소망의 근거를 물어오면, 부활 때문이라고 확실히 답할 수 있다. 부활은 아직 어둠이 머무는 땅, 흔들리고 진동하는 땅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의 확실한 소망의 근거이다. 온전히 이루어질 약속의 선취이다. 아직 몸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이미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부활에 속했기 때문에 확실하다(롬8:11; 고전6:14; 고후4:14). 연약한 교회가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근거이다. 성령의 일하심은 우리 가운데 이미 부활의 삶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고후3:18; 빌3:10-11).
부활은 오늘을 비추는 빛이다. 사망을 깨고 일어나신 주의 부활은, 다시 오시는 날 우리부활의 보증이다. 우리는 그 날을 소망하여 성찬에서 아버지 나라에서 새롭게 난 포도나무의 열매를 미리 맛보아 마신다. 주의 부활에 참여하여 오늘의 한 복판에서 부활의 날을 살아낸다. 미래를 소급하여 누리는 성도들은 깜깜한 어둠의 복판에서도 오늘을 빛으로 살아낼 수 있다. 부활은 아득한 미래의 어느 날에 이루어질 먼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을 사는 성도들의 힘이요, 권세이다.
부활을 모르는 이웃들은 우리의 삶을 기이하게 여길 것이다. 없는 자 같고, 무명한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살아가기에. 확실한 소망으로 언제나 만족하며 살고, 참된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들이기에. 오늘을 비추는 미래의 빛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말이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어둠의 현실을 바꾸어가는 공동체로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부활의 미래를 현재로, 이 세대로 가져오는 빛의 기관이요, 하나님나라의 현시(現示)이기 때문이다.
이종인 목사(울산언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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