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3월 1일은 민족의 독립을 위한 피 끓는 외침이었던 3․1독립운동이 100주년을 맞는다. 극심한 내우외환으로 근근이 명맥을 이어오던 조선이 1910년 8월 16일, 일본의 조선통감이 비밀리에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 같은 달 22일에 일본의 강압적인 힘에 의해 병합이 되면서 식민지가 되고 만다. 초유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된 한국인들은 일제의 가혹한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착취, 문화적 말살, 사회적 차별 등을 겪으면서 국권을 상실한 민족적 비애를 절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즉, 일본 정부의 직접적 지배 하에서 1908년 한국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앞세운 일본의 침탈로 인하여 대다수 농민들이 경작권을 박탈당하거나 토지를 잃고 유리하거나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이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고향산천을 떠나 만주로 이주하는 경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우민정책 내지는 동화정책을 목적으로 한 식민지 교육과 열악한 사회적 지위를 강요하는 민족차별정책 등으로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한국인들의 불만은 극에 달하였다. 따라서 일제의 주권 침탈과 탄압으로 형성된 민족적 한(限)을 떨치기 위해 전 민족이 독립 역량을 발휘하여 일으킨 최초이면서 최대의 비폭력적 항일독립투쟁이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났던 3․1독립운동이었다.
한편, 1919년 1월 21일 새벽 1시, 고종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고종의 죽음은 곧 일제에 의해 “황제가 독살을 당했다”는 소문으로 퍼져나가면서 이것이 3․1독립운동의 커다란 기폭제가 되었다. 고종이 독살을 당했다고 믿은 전국의 백성들이 3월 3일 고종의 국상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모여들었고, 이들은 그대로 3․1독립운동 시위대의 일원이 되었으며 각 지방으로 내려가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상황에서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에 유학하고 있던 600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도쿄에 있는 조선 YMCA회관에서 조선의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국내에도 독립운동에 대한 결의를 갖게 했다. 그런데 국내에서의 만세운동은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천도교측과 평양의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준비가 되고 있었다. 이것이 손병희의 천도교측이 기독교측의 이승훈, 함태영과 접촉하면서 일원화가 되었다. 따라서 독립운동을 진행함에 있어서의 자금은 천도교 측에서 부담하고, 인원동원과 연락은 기독교가 맡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2월 상순, 실무를 맡은 최린은 중앙학교장 송진우의 집 거실에서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과 회합을 갖고 독립선언서 의견서 및 청원서를 작성하기로 했는데 각 서면의 기초는 최남선이 담당하고, 박영효, 윤용구, 한규설, 김윤식 등 구한말 지도자들과의 교섭은 최린, 최남선, 송진우가 담당하고, 기독교에 대한 교섭은 최남선이 담당하기로 했다. 그리고 2월 7일 천도교 중심의 인물들이 지역과 종교를 초월해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이승훈을 통해 기독교측과, 한용운과 백용성을 통해 불교측과 힘을 결집하는 데 성공했다. 2월 21일 최남선은 이승훈을 방문하고 독립운동을 협의했다. 이 자리에서 “그 전날 밤 박희도 집에서 기독교 동지들이 회합하여 자기들 나름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는 말을 듣고 독립운동은 민족 전체에 관계되는 문제이므로 종교의 같고 다름을 불문하고 합동하는 것이 좋다는 취지를 극력 설파하여 합동할 것을 요구하자 이승훈은 동지들과 협의한 후 그 가부를 회답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이승훈, 박희도, 오기선, 오화영, 신홍식, 함태영, 현순 등 개신교측 지도자들은 세브란스병원 구내에 있는 이갑성의 집에서 천도교측과의 협력문제를 상의했고, 이 문제를 위임 받은 이승훈, 함태영은 2월 24일 최린을 찾아가 기독교와 천도교가 합동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할 것을 통보했다.
이들은 독립운동의 거사 일을 고종의 장례로 수십만의 민중이 경성(서울)에 모여드는 국장일 전전일인 3월 1일 오후 2시로 정하고 이날 2시에 파고다공원에서 모여 선언서를 낭독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기독교측 16인, 천도교측 15인, 그리고 불교측 2인으로 모두 33인이 구성되었고, 그 대표를 손병희가 맡았다. 그리고 이 운동의 윤곽이 명료해지던 때에 교회는 이승훈의 교섭으로 길선주를 비롯한 다수의 목사들이 참여하게 되고, 거기에 따라 장로교와 감리교를 비롯한 교회 전체의 대거 참여가 약속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운동에서의 근원적 통로였다는 것은 당시 교회가 가진 국내의 뚜렷한 전국적인 조직과 국외와 단단한 유기적 연락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1독립운동은 육당 최남선이 초안한 독립선언서에 담겨 있는 대로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세계만방”과 “자손만대”에 고하여 “민족자존의 정당한 권리”를 회복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독립선언의 장소가 파고다공원으로 결정되었으나 예기치 않은 폭력사태나 일제 군경의 교란을 우려한 박희도의 제의에 따라 하루 전에 당일 서울의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그리하여 선언서 당일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선언서에 서명한 후 종로경찰서에 전화하여 시위의 상황을 설명하고 자신들을 잡아가라고 한 후 출동한 일제 경찰에 자진 체포되었다. 반면에 당시 파고다공원에서의 만세시위를 주도한 것은 학생들이었다.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보성전문학교의 강기덕, 경성의학전문학교의 한위건 등이 학생대표 3인방이었는데, 이들 학생대표단은 천도교, 기독교계가 중심을 이룬 민족대표 33인과 3·1운동을 함께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식민지 조선의 경성 시내에 위치한 파고다공원에는 200여 명의 학생들이 운집했다. 파고다 공원의 가운데 있는 육각당(六角堂)에서는 두루마기를 입은 한 30대 남성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그는 10여 분간의 연설을 끝마친 후에 우렁차게 “조선민족 자주독립 만세”를 외쳤다. 자리에 있던 학생들도 한 목소리로 외쳤다. “독립 만세!” 200명으로 시작한 행진은 곧 3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시민들에게 나눠주면서 “만세만 부르면 독립이 온다”고 설명했다. 시민들 가운데 일부는 실제로 독립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여기고 어깨춤을 추며 같이 행렬에 나섰다.
약 2시간 동안 경성 시내를 뒤덮은 만세 시위대는 오후 4시가 되자 남산 자락에 위치한 조선총독부로 향하기 위해서 당시 일본인들의 밀집 거주지였던 혼마치(本町, 현 충무로) 입구에 모였다.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조선총독부는 당시 용산에 주둔하던 조선군사령부에 급히 지원 병력을 요청하여 보병 3개 중대와 기병 1개 소대로 저지선을 구축했다. 오후 5시, 일제 군경과 맞닥뜨린 시위대는 돌파를 시도했지만 더 이상 진격하지는 못하고 2시간여의 육박전 끝에 현장에서 134명이 경찰에 붙잡히게 된다. 반면에 당시 경찰에 붙잡히지 않은 시위대 가운데 1000여 명은 연희전문학교(현 서울 연세대) 앞과 마포전차종점 등지에서 밤 12시를 넘긴 시간까지 만세 시위를 이어갔다. 3월 1일 경성 시위는 그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들의 애절한 외침은 1년여간 한반도 전역은 물론 간도(현, 만주)와 연해주, 미국, 일본 등지로 퍼져나갔다.
3․1독립운동은 한국인들이 신분과 직업, 계급, 지역 그리고 종교를 초월하여 대동단결하여 일어난 사건으로서 한국인이 근대민족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3․1독립운동은 한민족의 주체적인 독립 쟁취에 대한 자신감을 부여했고, 이후 전개된 독립운동의 지속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아울러 세계인들에게 한민족의 자주독립 의지와 역량을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교회와 교인들이 있었다. 즉, 3․1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의 시점에서 한국교회는 나라와 민족 앞에서 빛과 소금으로서 희망이 되어줄 것을 요청 받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3․1운동은 당시 전국적으로 유기적인 조직망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비밀의 연락과 거사의 동시성을 기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종교적 단체라고 할 수 있는 교회가 중심이 된 거대한 민족운동이었다. 3․1독립운동은 “교회가 그 중심”으로 미쳤던 민족 운동의 거대한 몸부림이었다. 무엇보다 전국적으로 서울과 같은 날, 거의 같은 시간에 “일시에 광분노호(狂奔怒號), 수습할 수 없으리만큼” 터져 나갔을 뿐만 아니라 서울과 시간적 행동의 보조를 맞출 수 있었던 것은 전국적인 유기적 조직망을 가지고 있었던 교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교회는 독립운동의 동력을 하나로 결집하여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던 것이다.
3․1독립운동 당시 개신교 인구는 전체 인구 1,600만명 가운데 23만4,000명 정도로 전체 인구의 1.5%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19년 5월 조선총독부의 통계를 보면 3․1운동으로 수감된 전체 9,059명 가운데 개신교인이 2,036명으로 22.5%를 차지했고, 종교를 가진 사람들 가운데서는 52.9%를, 여성 가운데서는 무려 65.6%를 차지했다.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개신교인은 300만명 이상의 신도가 있었던 천도교의 민족대표 보다 오히려 1명이 많은 16명이었다. 그만큼 개신교인들은 백척간두에 있던 민족의 문제에 적극 참여했고, 개신교 여성들은 공공의 영역에서 선도적으로 활약했다고 할 수가 있다. 한 마디로 칠흙같이 어두운 시기를 지나는 민족 앞에 한국교회와 교인들은 말 그대로 빛이요, 등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와 교인들을 보면 아쉬움과 염려를 떨쳐버리지 않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 3․1독립운동의 중심에 교회와 교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 사실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교인들에게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교회가 3․1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암울했던 시기에 한국교회가 민족과 백성들에게 빛이었으며, 갈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민초들에게 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는 사실을 알게 해야 한다. 그리고 전체 인구 5,000여만 명 가운데 19.7%인 967만명으로 최대 종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회의원이나 고위공직자의 경우비율이 50%를 훨씬 상회하는 한국의 교회가 사회적 위상에 맞는 제 역할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늘의 한국교회가 다시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고 3․1독립운동 당시에 못지않은 소금과 빛이 되어 세상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되었으면 한다.
오주철 목사
언양 영신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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