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득, 오래전 마이클 카드가 쓴 “비탄의 시대를 살아내는 힘-헤쎄드”가 생각납니다.
방어진 항구 너머로 겨울 바다의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는 날이면, 파도는 거침없이 무너지고 그 사이로 터쳐나오는 무수한 파편들은 하얀 연기처럼 사방으로 솟아오른다. 문득 지금 내가 마주한 세상의 풍경처럼….
매일 쏟아지는 뉴스는 온통 상실과 탄식뿐입니다. 나라 밖으로는 끝을 알 수 없는 전쟁과 갈등이 힘없는 이들의 삶을 짓밟고 있으며, 안으로는 날카롭게 쪼개진 진영 논리와 경제적 한파가 우리의 마음을 얼어붙게 합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숨 막혀 하는 청년들, OECD 최고 수준의 자살률과 최저 수준의 출산율이라는 지표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이 시대가 얼마나 깊은 ‘비탄(Lament)’에 빠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비명과도 같습니다. 새근새근 잠든 손주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이 거칠고 메마른 세상을 앞으로 어떻게 살아낼까 하는 깊은 먹먹함이 밀려오곤 합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이 비탄의 시대에, 우리는 과연 어디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을 성경의 오래된 단어, ‘헤세드(Hesed)’에서 찾습니다.
헤세드는 우리말로 보통 ‘인자(仁慈)’, ‘자비’, ‘사랑’으로 번역되지만, 그 깊은 의미를 하나의 단어로 담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헤세드는 감정적인 끌림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방이 자격을 상실했을 때조차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언약적이고 고집스러운 사랑’이며, 절망의 밑바닥에서도 기어이 찾아와 손을 내미는 ‘변함없는 은혜’입니다.
사람이 자기 옳은 대로 행하던 사사시대에 나오미 가문의 극적인 회복의 근거와 조국 예루살렘이 처참하게 멸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끔찍한 비탄의 한복판에서 불렀던 선지자 예레미야의 노래 주제는 ‘헤세드’입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예레미야애가 3:22~23)
여기서 말하는 ‘인자’가 바로 헤세드입니다. 세상의 기초가 흔들리고 개인의 삶이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도 우리가 완전히 파괴되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변함없이 우리를 붙드시는 절대자의 헤세드가 아침마다 새롭게 우리를 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깊은 통찰로 담아낸 기독교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는 그의 책 『아아, 잃어버린 나의 아들(Lament for a Son)』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통받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바로 그 고통받는 자들 곁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실 뿐만 아니라, 친히 우리와 함께 우시는 분이다.”
비탄의 시대를 이기는 힘은 얄팍한 긍정의 심리학이나 ‘다 잘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에서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비탄 한가운데로 기꺼이 들어오셔서 함께 눈물 흘리시며 우리를 끌어안으시는, 그 무한한 헤세드의 사랑을 온전히 신뢰할 때 비로소 싹틉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지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고통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척박한 세상 속에서도 서로를 향해 ‘헤세드’를 흘려보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곳에는 여전히 천국의 희망이 존재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빛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각자도생의 차가운 세상 속에서, 조건 없이 베풀고 끝까지 인내하는 헤세드의 사랑은 그 자체로 세상을 향한 강력한 저항이자 대안입니다. 우리가 먼저 그 사랑에 잇대어 살아가며, 상처받은 이웃들에게 기꺼이 곁을 내어줄 때, 비탄은 변하여 마침내 희망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차가운 시대에 교회가 걸어가야 할 방향이다.
오후교회 최성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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