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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발행인칼럼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겸손”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세상과 분리하여 교회공동체 안에서만 살아가라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신 주인이시고 인간은 그 주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신7:11)를 따라 살다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한 사명을 잘 감당하고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라고 할 때 그 대상은 세상이라고 하셨다. 세상이란 어느 특정한 계급이나 계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하신 말씀인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3~16)

  그렇다면 소금과 빛은 성도들을 대체하는 용어인데 소금이 맛을 잃으면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했고, 빛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등잔 위에나 산 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빛의 정체성과 역할을 말씀하는 것이다. 소금을 대체할 식품이 없고 빛을 대체한 다른 원소가 없듯이 성도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 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도들을 소금으로 빛으로 만드는 일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와 규례를 가지고 바르게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먼저 가르치는 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몸소 본을 보여주셨다. 그 본은 낮아지신 겸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보여주신 겸손은 어떤 것일까?

  첫째는 자기 기득권을 포기한 겸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런 전능하신 분이 자기의 기득권을 다 내려놓고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개미가 되고 하루살이가 되는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자기 비하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2:6~7)

  내가 은퇴를 앞두었을 때 많은 이야기가 귀에 들렸다. 은퇴하면 정말 고독하고 외로워진다. 교인들의 전화도 없고 이래저래 배신감이 들것이라고. 그러나 지금 은퇴 후 4개월이 지나가지만 오히려 감사가 넘치고 행복하다. 그 이유는 사랑하는 아내와 그동안 사역에 밀려 나누지 못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매일 큐티를 하며 교회와 후임목사님,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너무 좋다. 그동안 나의 사역을 마감하고 나라를 위하여 교단을 위하여 개척교회를 위하여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둘째는 섬김으로 나타난 겸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은 섬기지 말고 군림하라고 가르친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높아지려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 되도록 가르치니 그것을 시행하다 결국 지옥행세가 된 것이다. 이런 우리를 살리기 위해 이 세상에 예수님은 처음부터 섬기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다. 최고의 섬김은 자기를 주는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셋째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완성된 겸손이다. 

  겸손의 극치는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사람이 입으로만 번듯하게 말하고 책임을 지지 않고 오히려 분란만 일으켜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행위는 교만이며 사탄의 전략이다. 자기를 드러내는 곳에는 얼굴을 들고 서 있다가도 져야 할 십자가가 나타나면 살며시 도망가고 꼬리를 빼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극치의 겸손을 보여주셨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

   넷째는 불의에 항거하는 겸손이다. 

  예수님은 조용히 숨어 다니시거나 할 말이 있어도 침묵하신 분이 아니시다. 12명의 제자들을 택하시고는 그들을 내보내실 때 하신 말씀이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마10:16)라고 하시고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려 왔노라.”(마10:34)고 하신 것은 우리의 삶의 환경은 불의한 세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굴복하며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살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이 세상의 불의를 꾸짖고 책망하여 바른길로 가도록 하라는 선지자적 사명을 주신 것이다. 

  하루는 어떤 바리새인이 와서 말하기를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라고 하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 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눅13:32)고 하시면서 헤롯왕을 가리켜 ‘저 여우’라고 책망을 하셨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 그는 포도원을 허는 여우요, 찢는 사자요, 지옥 갈 사탄인 것이다. 

  우리는 겸손을 오해할 때가 많다. 단정한 자세에 저음의 말로 자기를 아주 낮추는 것이 겸손이 아니다. 겸손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삶에 있고 행동에 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낮아짐과 겸손을 본받아 살아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