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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교계일반

“헬라 사람(이방인) 누가는, 어떻게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을 썼을까”

  한국 사람에게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모두 유대인 이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마태(헬라어)의 히브리어 이름은 레위이며, 마가(헬라어)의 히브리어 이름은 요한이다. 반면에 누가는 헬라인(그리스인)으로, 히브리어 이름이 없다. 신약성경 저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유대인이 아닌 사람이 바로 누가이다. 그의 직업은 의사였으며, 바울은 그를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골 4:14)라고 불렀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눅1:3)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의학적 용어와 관찰력이 섬세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으며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한 여자가 있더라”(눅 8:43)는 묘사나,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눅 10:34) 같은 기록은 단순히 “도와주었다”고 하지 않고 치료 절차를 묘사함으로써 의학적 배경을 가진 저자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장면을 그려낸다.

  또한 누가를 성경이 직접적으로 “역사 기록자”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누가복음 1장3절에서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누가)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나니”라고 말하듯이, 그의 글쓰기 방식은 고대 헬라 역사 서술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이처럼 누가는 단순한 신앙적 진술이 아닌, 조사, 수집, 검증의 과정을 거친 역사적 저술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이방인 누가가 어떻게 유대 기독교인의 성경을 두 권이나 쓸 수 있었을까? 그의 저작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단 두 권이지만, 신약성경 전체 분량의 약 27%(단어 기준)를 차지한다. 두 책 모두 ‘데오빌로’에게 헌정되었는데, 데오빌로는 이 책의 저작 비용의 후원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이 정도 분량을 양피지에 필사하려면, 양피지 약 150장(약 300데나리온)과 전문 필사자 인건비(약 300데나리온) 및 조사와 체류에 필요한 비용 등을 고려할 때, 현재 가치로 수천만 원에서 1억 원에 달하는 비용이 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누가는 유대인이 아님에도, 어떻게 유대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고 글을 쓸 수 있었을까? 그 실마리는 사도행전의 바울의 여정에서 찾을 수 있다. 누가는 바울의 전도 여행에 동행했다.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행 21:17), 누가도 함께 했다.   그 후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2년간 억류되었는데(AD 57~59년), 이 기간에 누가는 예루살렘 인근에서 체류하며 자료 조사를 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이 기간에 누가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예수의 형제 야고보, 그리고 초대교회 제자들로부터 직접적인 증언을 들었을 것이다. 특히 마리아의 내면 묘사(눅 1~2장)와 어린 시절 예수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이를 강하게 시사한다. 또한 이 시기는 이미 마가복음이 기록되어 유통되고 있었을 것이다(전통적으로 마가복음 기록은 AD 50년대 후반으로 추정). 누가는 이를 참고하면서도 체계적인 자료 수집을 통해 복음서를 저술했을 것이다.

  이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었을 때(AD 60), 누가도 같은 배에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 여정에서 발생한 유라굴로 광풍과 난파 사건은 사도행전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누가가 그 현장에 있었던 증인임을 보여준다. 또한 바울이 로마 가택연금 중일 때(AD 60~62), 바울은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딤후 4“11)고 말했는데, 이는 누가가 끝까지 바울 곁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누가는 바울이 AD 67년경 순교할 때까지, 바울을 돌보며 함께했다.

  정리해 보면, 누가와 바울의 첫 만남은 AD 50년경 2차 전도 여행 중 드로아이며(행 16:10), 누가는 이후 약 15년 이상 바울과 간헐적 동행이 있었고, 최소 6~8년 이상은 바울과 직접 동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누가는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복음이 실제로 유대에서 시작되어 로마까지 확장되는 전 과정을 목격하고 체험한 증인이었다. 

  

  그렇다면 언제 썼을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바울이 로마 가택연금 중이던 AD 60~62년경에 집필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시기는 바울의 공개 선교가 잠시 중단된 시기였으며, 누가에게는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정리하고 집필하기에 가장 안정적인 시기였다. 또한 누가는 헬라인으로서 헬라어에 능통했고, 헬라 문화를 이해한 인물이었다. 당시 로마 제국 전역에서 헬라어는 공용어였으며, 교육·행정·종교 모든 영역에서 쓰였다. 초대 교회에서도 언어 장벽을 극복하는 일이 선교의 핵심 요소였다. 예를 들어,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자 역할을 하며 마가복음을 기록했다.

  누가는 유대인이 아니었지만, 예수의 생애와 초대 교회의 시작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던 헬라인 출신의 의사이자 탁월한 역사 기록자였다. 그는 사도 바울과 동행하며 복음의 현장을 직접 보고 들었고, 그 경험으로 예수의 생애와 복음의 확장에 관해, 문화가 다른 헬라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는 기록물을 남겼다. 

  이러한 누가의 접근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이를 문화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오늘날 한국 문화를 ‘K-컬처(한류)’라고 부르는데, ‘K’를 Kingdom(킹덤)의 약자로 받아들여, ‘Kingdom Culture’ 즉 ‘하나님 나라의 문화’라고 생각해 보자.

  지금은 ‘영토’ 중심이 아닌, ‘문화’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드러내고 전파해야 할 때이다. 먼저는 국내에서 하나님의 문화 영토를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인 것 같다. 유튜브를 보면, 이단에서는 전략적으로 기독교 영화나 다양한 자료들은 생성한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에서는 목사님의 설교 동영상이 대부분이다. 전략적으로 사이버공간을 공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상당한 다음 세대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한 교단이라도 소명 의식을 갖고 이 분야에 영적 투자와 재원 투자가 병행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젊은 이슬람교도를 위한 기독교 소개 영상 등을 영한 번역으로 만든다면 밀려드는 이슬람 문화의 공세를 역전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K-컬처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이 흐름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가치가 스며들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K-컬처는 이제 단순히 한 국가의 문화 확산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창조하고 나누는 플랫폼이 될 수 있다. 이제 우리와 교회와 교단은 이를 부름을 받은 존재로 자각할 때이다.

서동호 장로(울산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