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의 설교 모음인 신명기(19장 14절)에 “너는 네 이웃의 지계표(地界標)를 옮기지 말라”는 말씀이 나온다. 지계표는 땅의 경계를 표시하는 것이다. 당시에는 큰 돌덩이를 세워 땅의 경계를 구분했다고 전해진다. 농업이나 유목에 의존했던 시대에 땅의 위치, 크기, 물과의 거리 등은 한 부족의 삶 전체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였다. 그러니 지계표는 단지 소유권을 나타내는 표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동체의 질서와 생존을 위해 허락하신 일종의 경계이자 정의의 기준점이었다.
지계를 지킨다는 것은 한 사람의 삶의 자리를 존중한다는 뜻이고,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이며 약속이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직접 “지계를 옮기지 말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우리 민족 역사의 굴곡 속에서 이 지계가 무너지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고구려와 발해 같은 나라는 아예 지도에서조차 사라졌고, 한반도로 축소된 조상의 경계는 외세의 힘에 따라 여러 차례 강제로 바뀌었다. 현대사의 비극인 한반도의 분단도 마찬가지였다. 한 민족이 둘로 나뉘고, 표준말과 사상과 제도가 다르게 흘러가면서 공동체로서의 ‘우리’는 찢겨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고통스러운 분단과 전쟁의 시간 속에서 또 하나의 지계, 즉, 인간이 만들어낸 거짓된 지계로서의 신분의 벽은 무너져 내렸다. 전쟁 전, 태어나자마자 양반이냐 상민이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되었고, 심지어 동족을 노비로 삼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던 시대가 있었다. 그 잔혹하고 왜곡된 신분 질서는 사람이 만들어낸 불의의 경계였다.
1950년부터 3년간 계속된 참혹한 동족상잔의 전쟁은 모두의 삶을 평등하게 무너뜨렸다. 모두가 가난했고, 모두가 상처받았다. 그러나 바로 그 폐허 속에서 우리는 신분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라는 인식, 즉 동일하게 존엄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신분제는 없어져야 할 거짓된 지계였고, 전쟁과 분단은 그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 우리에게 더 나은 사회의 방향을 제시했던 셈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지계가 누군가에 의해 움직이고, 또 다른 형태로 설정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지식의 경계, 경험의 경계, 창의와 노력이 축적된 결과물의 경계가 움직이고 있다. 논문 표절, 기술 절도, 아이디어의 무단 사용 등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뉴스가 되었고, 심지어 능력으로 포장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하나님의 정의를 거스르는 것이며, 이웃의 지계를 무너뜨리는 죄이다. 지식과 노력의 열매는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맡기신 삶의 몫이다. 그것을 함부로 넘보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삶의 터전을 침범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지적 지계’도 신실하게 지켜야 한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실천이며, 공동체를 지키는 도리이다.
새로이 설정되는 지계의 예도 있다. 어떤 정치인은 ‘가재, 붕어, 개구리로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얼핏 경쟁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을 위로하는 듯한 말로 들리는 이 말이 실상은 새로운 신분제의 도래를 예고하는 말로 들리는 것은 나의 환청인가? 소유한 권력, 부, 관계, 유명세를 지표로 하는 신분제라는 허위의 지계를 설치하고는 그것을 옮기려 하지 말라고 하니 그것을 모세의 설교에 대한 동의라고 받아들여도 되는가 말이다.
우리는 지금, 참된 지계와 허위의 지계를 분별해야 할 시대에 서 있다. 사람 사이의 존엄과 수고는 존중되어야 하며, 그것은 지켜야 할 지계이다. 반면, 태어남이나 배경, 계층에 따라 인간을 나누는 모든 제도적 경계는 사라져야 한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공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타인의 경계를 지키고 있는가? 혹시 그 경계를 넘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내 삶이 하나님의 질서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세워지고 있는가? “지계를 옮기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든 시대의 백성들에게 주신 질서의 선언이며, 정의의 기준이다. 우리가 그 말씀대로 산다면, 세상은 조금 덜 혼란스럽고, 인간은 조금 더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주여, 주께서 우리 조상에게 주신 땅을 회복시켜 주소서. 제게 주신 지경을 넓혀주시되 남의 것을 탈취하거나 사취하지 않고 개척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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