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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특별기고

“전도 여행의 낙오자 마가는 어떻게 마가복음의 저자가 되었는가”

 마가는 초대교회 역사 속에서 흥미로운 전환을 겪은 인물이다. 그는 처음부터 강력한 믿음을 보인 인물이 아니었으며, 바울과의 1차 전도 여행 중 도중에 이탈함으로써 ‘낙오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후 그는 회복과 성숙의 과정을 통해 마가복음의 저자가 되었고, 초대교회의 중요한 사역자가 되었다. 이 과정을 살펴보자.

  마가는 예루살렘 출신으로, 어머니 마리아는 예루살렘 초대교회 내에서 모임 장소를 제공할 만큼 부유한 인물이었다(행 12:12). 당시 마가의 집은 시온산 언덕이었고, 당시 고위 관리와 제사장들이 모여 살던 부자 동네였다. 청와대 인근의 삼청동이랄까? 마가의 다락방은 좁고 낮은 다락방이 아닌, 회의와 공동체 기도가 가능한 넓은 공간으로, 마가는 ‘큰 다락방’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큰 다락방’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 이루어진 장소였고, 120명 성도가 기도한 곳으로 추정한다. 이처럼 마가는 마가의 집이 교회여서, 예수님은 물론 초대교회의 제자와 지도자들을 가까이서 접하며 자랐을 것이다.

  마가복음 14:51~52에서 도망치는 한 청년에 대한 짧은 언급은 전통적으로 마가 자신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는 마가가 예수님의 생애를 어린 시절부터 목격했고, 체험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였으며, 바나바는 초대교회에서 신뢰받는 리더로서 바울을 처음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했던 인물이었다. 마가는 이러한 신앙적·가정적 기반 속에서 성장했다.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한 1차 전도 여행에 동행했다. 그러나 마가는 버가에서 갑자기 이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다. 성경은 그 이유를 직접 밝히지 않지만, 금수저라 할 수 있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마가에게 전도 여행은 극한 체험이었을 수 있고, 한편 바울이 선교의 주도권을 점차 가지면서, 바나바의 조카로서 마가는 정서적 갈등을 겪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37:24)

  마가의 이탈은 바울에게 깊은 실망감을 안겼다. 이후 2차 전도 여행을 계획할 때 바나바가 다시 마가를 데려가려 하자, 바울은 강하게 반대했고, 결국 두 사람은 갈라서게 된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향했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새로운 길을 나섰다. 마가는 바나바와 함께하면서 다시 한번 선교의 실전 훈련을 받고, 좌절을 겪은 신앙이 점차 회복되어 갔을 것이다. 바나바는 성경에서 “위로의 아들”(행 4:36)로 불릴 만큼 온유하고 사람을 세우는 데 뛰어났던 인물이다.

“하나님은 다시 일어서는 자를 (그림1.2_그림책마을 이무현)

  마가는 사도 베드로의 제자가 되어, 베드로 곁에서 사역했다. 베드로전서 5:13에서 베드로는 마가를 “내 아들 마가”라고 부른다. 이는 마가가 베드로의 영적 제자이며, 마가는 베드로의 증언과 설교를 바탕으로 마가복음을 기록하였다. 특히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부인하는 실패를 경험한 자였기에, 마가의 실패를 공감하고 그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가는 바울과도 다시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 바울은 골로새서 4:10과 빌레몬서 1:24에서 마가를 자신의 동역자로 언급하고, 디모데후서 4:11에서는 “마가를 데리고 오라. 마가가 내게 유익하니라”라고 말한다. 이는 마가가 다시 바울의 신뢰를 얻었으며,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마가는 바나바와 베드로라는 영적 멘토를 통해 성장했으며, 바울과도 화해함으로써 초대교회의 두 핵심 사도들(바울과 베드로)과 모두 연결된 독특한 인물이 되었다. 후에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의 초대 감독으로 섬겼다는 전승이 있다. 마가는 그곳에서 복음을 활발히 전하다가 이교도들에게 붙잡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때 전도 여행에서 이탈했던 마가는 실패와 낙오의 상징처럼 보였지만, 바나바의 격려와 베드로의 양육, 그리고 바울과의 화해를 통해 다시 일어섰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 공동체에도 상처와 좌절, 혹은 실수와 낙오로 인해 공동체를 떠나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이른바 ‘가나안 성도’들이 적지 않다. 마태복음 23장 13절에서 예수께서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으며, 들어가려는 자들까지 막는 자들을 책망하셨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신앙의 열심과 경륜이 오히려 다른 이들의 회복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는 경우가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가 빠지기 쉬운 오류 중 하나가 바로 ‘생존자 편향’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교회에 여전히 남아 있고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만을 기준 삼아 “믿음이 있으면 견뎌 낸다”, “진짜 성도는 떠나지 않는다”는 식의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공동체를 떠난 수많은 이들은 보이지 않기에, 그들의 사정과 상처는 무시되기 쉽다. 마치 전쟁에서 돌아온 비행기만을 분석해 총알 자국이 많은 부분을 보강하려 한 것처럼, 우리는 ‘남아 있는 성도들’만을 보고 교회의 건강을 평가하거나, 회복의 방향을 결정하려 한다. 그러나 사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보이지 않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시선 속에서 마가의 여정은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을 준다. 그는 처음엔 실패하고 낙오했던 인물이었지만, 공동체의 품 안에서 회복되고 다시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복음의 기록자가 되었다. 마가는 완벽해서가 아니라, 다시 일어섰기 때문에 하나님께 쓰임 받았다. 실수했을지라도, 낙오했을지라도, 누구든지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며, 하나님은 바로 그런 이들을 통해 역사하신다.

서동호 장로(울산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