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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이종인 목사와 이 달의 책

『놀이하는 인간』

  전통적으로 사람은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로 불려왔습니다. 근대 이후에는 사람이 도구를 이용하여 노동하는 존재라는 의미로 호모 파베르(Hom Faber)라고 불렸습니다. 20세기에 들어 네덜란드 역사학자 요한 호이징아(Johan Huizinga, 1872-1945)는 이전의 인간에 대한 정의를 넘어서 인간의 본질을 ‘놀이하는 존재’(Homo Ludens)라고 주장했습니다. 사람은 단지 생존을 위해서 일하는 존재에 몰두하는 것으로 그치는 존재가 아니며, 보다 높은 가치와 더욱 고상한 것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 호이징아는 1872년 12월 7일 네덜란드 흐로닝언(Groningern)에서 태어났습니다. 네덜란드의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문화사가로 그의 대표작이 오늘 소개하는 『호모 루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언어학을 공부하면서 산스크리트어와 같은 고전을 탐독했지만, 이후에는 역사학으로 전향하여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의 문화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라이덴 대학(Leiden University)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역사적 나열을 넘어서 문화, 예술, 놀이 등의 요소가 인간사회에 미친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 깊은 연구했습니다.『호모 루덴스』외에도 중세 말기 유럽의 문화적 쇠퇴를 생생하게 묘사한 『중세의 가을, 1919』과 인문학자 에라스뮈스의 생애를 다룬 책『에라스뮈스, 1924』 등이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학문적 자유를 지키기 위해 나치에 저항했고, 말년에는 전쟁의 여파와 건강악화와 어려움을 겪다가 1945년 2월1일 아른험(Arnhem)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요한 호이징하, 『호모 루덴스』 김윤수 역, 까치

  본서에서는 ‘놀이’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 놓는 본질을 정의합니다. 본서의 첫머리에서 놀이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놀이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유롭게 자발적인 인간의 행위라고 이야기합니다. 놀이는 규칙에 의해서 구조화되고 일상적인 삶과 분리된 특별한 시간과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인간만이 지니는 창의적 유의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놀이는 문화와 깊이 관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놀이가 문화를 형성하고 만들어내는 핵심 동력이라고 말합니다. 법, 종교, 예술, 철학, 정치와 경제, 전쟁까지 인간 사화의 다양한 영역이 놀이적 요소로부터 기원했거나 영향을 받았다고 파악합니다. 의식(ritual)이나 경쟁은 놀이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놀이의 특징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놀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정해놓은 목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며, 즐거움과 몰입에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또한 놀이는 질서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저자는 현대 사회에서 놀이의 순수성이 상업화되고 전문화, 관료화되어서 퇴색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진정한 놀이정신이 사라지면서 문화의 창조적 활력도 상실되어져간다고 현대사회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호모 루덴스』는 인간을 놀이하는 존재(Homo Ludens)로 규정하면서 놀이가 단순한 여가 활동을 넘어서 인간성과 문명의 본질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말합니다. 이후의 문화사와 인류학 철학 등에 다양한 분야 영향을 끼친 고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에 대한 『호모 루덴스』의 접근법과 다른 문화이론들도 많이 존재합니다. 예로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신화학』은 일상생활의 사소한 문화적 현상들에는 숨겨진 이데올로기와 신화가 근본적으로 깔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서양이 동양을 어떻게 표상했는지를 살피면서 문화적 재현이 권력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밝힙니다. 마크 피셔(Mark Fisher)는 『자본주의적 리얼리즘』에서 현대의 자본주의가 문화와 사고방식을 어떻게 지배하는지 살피면서 문화적 상상력을 쇠퇴시키는 주범이라고 비판합니다. 호이징아가 『호모 루덴스』를 통해 비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으로 따라 지음 받은 사람에게 ‘문화명령’을 부여했습니다(창1:28). 하나님의 창조질서 속에서 주어진 인간의 문화 활동은 창조세계를 누리는 방식의 일부입니다. 인간은 단순한 노동하는 기계가 아닙니다. 안식일을 통한 쉼을 주시고, 유희존재로 빚으셨습니다. 놀이 속에는 규칙과 질서가 세워지게 되고, 상호 협력하는 방식으로 창의적으로 서로를 세워가는 성장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남녀로 만드셨고 가정을 주셔서 처음부터 공동체로 창조하셨습니다.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뻐함으로 하나로 묶이게 만드셨습니다.

  태어나면서 주신 달란트와 은사는 놀이의 재능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술, 스포츠, 학문에 대한 관심과 연구, 탐색 등 온갖 방면의 깊은 몰입은 놀이행위와 다르지 않습니다. 즐겁게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적 재능을 개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고전10:31). 뿐 아니라 놀이와 게임을 통한 학습방법이나, 역할극과 시뮬레이션과 같은 방식을 이용한 교육, 협동학습 등도 사람의 유희본능을 잘 이끌어내어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 전체를 ‘유희인간’으로 재단하는 것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타락한 본성을 따라 놀이를 왜곡할 수 있고, 폭력적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트럼프의 관세놀이나 시진핑의 독재놀이, 푸틴의 전쟁놀이는 창의적 방식보다는 자기이익과 이웃에 대한 파괴를 불러오는 폭력적 게임이며, 불장난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도한 놀이에 대한 몰입은 중독을 낳을 수 있고, 쾌락주의적 삶으로 기울어져 균형을 잃게 하고(전2:1~11), 하나님 앞에서의 소명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노동과 책임을 등한시하게 만들고, 현실도피적인 성향으로 경도되기 쉽습니다. 놀이가 현실참여를 반대하고 헌신을 방해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기에 바른 균형을 잡아 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