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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특별기고

『기독교와 울산의 독립운동』

  올해는 1919년 3.1일 만세운동이 일어난지 106번째가 되는 해이다. 울산에서도 대규모적으로 일어났던 만세운동에 대하여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했던 역할과 의의를 살펴보고 오늘날 나라와 지역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소명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언양의 3.1만세운동

  3.1일에 시작된 만세운동은 서울과 평양, 의주·선천·안주·원산·진남포 등 6개 도시에서 동시에 시작되었다. 울산에서는 약 한달 뒤인 4월 2일에 언양에서 장날을 깃점으로 가장 먼저 일어났다. 이 날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날로 대규모 집회를 하기에 매우 적격이었다. 

  갑오경장 이후 1896년부터 장날은 양력으로 시행하게 됨에 한일합병 이후 전국의 5일장은 양력으로 시행하게 되었는데, 언양 장날은 2일과 7일에 열렸다. 장날이 열렸을 때, 누군가가 “조선인이면 누구든지 만세를 부르라”고 고함치며 시위를 유도하였다. 장터는 곧장 감격과 흥분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위급한 상황을 파악한 일본주재소(언양파출소)순사와 울산본서(경찰서) 순사 수십 명은 주동자 몇 명을 주재소로 연행했다. 이에 노한 군중은 주재소로 몰려갔다. 석방을 요구한 시위군중에 대해 수적으로 부족한 왜경은 급기야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언양의 만세운동은 그렇게 진행되었다. 

  언양의 독립만세운동에 있어서 기억할 만한 사실은 교회들이 직접적으로 연관된 기록은 찾지 못하였으나, 당시에 활동한 애국지사들 가운데 천전교회 설립자인 김원집 공(公)과 같은 이는 울산의 주민들과 청년들을 계몽시키기 위해, 보신교습소, 양정의숙 등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후진들의 양성과 애국심 고취에 힘쓰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2) 병영의 3.1만세운동

  병영에서는 1919년 4월 4일과 4월 5일 이틀간에 걸쳐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성곽도시였던 병영은 대한제국의 국권 상실 이후 일본인들의 진출로 발전한 장생포나 방어진 등의 어항(漁港)과는 달리 전통적인 면과 항일(抗日)의지가 강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만세운동 당시에 이미 병영청년회가 조직되어 있었으며 이 조직이 3.1 독립운동 당시에는 하나의 비밀결사단체로서 맹활약을 하였다. 

  중요한 점은 이들 청년회에는 기독교인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는 사실이다. 서울에서 3.1 독립선언이 일어나자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각지에서 항일독립투쟁과 만세운동이 불꽃처럼 번져나갔는데 울산에서는 4월 4일 아침 9시경, 당시 병영의 사립학교였던 일신학교( 현재의 병영초등학교) 교정에 병영 청년회원들이 모여서 일신학교 학생들과 함께 합세한 후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광경을 보게 된 성내의 시민들이 합세하여 삽시간에 군중이 늘어나고 감격한 주민들이 눈물을 흘리며, 외치는 만세 소리가 시내를 진동(振動)시켰다. 이 거사에 가장 용감하였던 이문조, 이현우는 병영교회의 신도였고, 그 후 옥고를 치루고 나온 의거 지사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병영교회에 출석한 이들이었다. 

  한편, 사태의 긴박성을 느낀 일본 관원들은 시위군중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일본 군경의 무차별 사격으로 시위군중의 선두에 섰던 엄준, 주사문, 문성초, 김응룡 등 4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3명은 중상을 입었다. 

   3) 남창 3.1 독립 만세운동

  남창의 독립운동은 온양과 운산지역의 이(李)씨 문중이 기반이 되었다. 남창 장날인 4월8일 아침 일찍 주동자 이용락 등이 제작한 태극기 등을 가지고 장꾼들에게 나누어주고 그 선두에 서서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다. 남창 의거의 직접적인 동기를 제공하였던 웅촌면 석천리의 이재락은 1919년 광무황제의 인산(因山)일에 참여하였다가 기미 3·1독립운동에 참여하고 그 길로 귀향하여 남창 의거를 적극 종용(慫慂)하였다. 남창 지역의 최초 교회는 남창교회(1928년 설립)인데, 당시에는 아직 교회가 세워져 있지 않아서 1919년의 만세운동에 교회나 기독교인의 참여에 대한 기록은 아직 보이질 않는다.

   4) 그 외 독립운동

  울산 출신으로 독립운동과 만세운동을 일으킨 사람들 중 안영두(安泳枓) 학생은 울산의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둘 만하다. 그는 울산군 범서읍 굴화리 본적을 둔 18세 학생으로 굴화리교회(지금의 울산수정교회) 출신이며 대구 유학중 계성학교 학생으로 학교기숙사에 있으면서 1919년 3월 8일 대구 남산정 의거에 참여하였다. 이는 울산 그리스도인 학생들의 남다른 독립 의지를 보여주는 매우 귀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3.1운동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울산이 배출한 우리나라의 위대한 한글학자인 최현배 선생도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당시 일제는 민족주의 계열의 조선학연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우리말 연구 활동을 철저하게 탄압하였는데, 1942년 10월1일 조선어학회사건이 일어나자 울산 출신의 한글학자 최현배(崔鉉培, 울산군 하상면 동리)를 비롯한 많은 국어학자들이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최현배는 이 사건으로 징역 4년을 언도 받고 복역 중 해방을 맞았다.  

  외솔 최현배는 철저한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울산 병영교회에서 국문을 가르치는 야간 학숙에 다녔으며, 울산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았다. 소년 시절에는 병영교회 교회학교에서 신앙의 기초를 다졌으며, 국어 국문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울산신문). 후에 그는 이화전문학교 조교수로 취임하면서 새문안교회에 출석하였고, 1930년에 새문안교회 서리 집사로 임명, 1940년에 안수집사로 임명을 받았다. 이를 볼 때, 그의 지극했던 나라 사랑과 한글 사랑은 바로 기독교 정신의 실천이었던 것이다. 그는 일제 시대 마지막 순간까지 한글을 지킨 곳이 다름 아닌 교회임을 지적하면서 아래와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일제가 그 말기에 다다라서는 우리말, 우리글을 정책적으로 아주 말살하려 악랄한 수단을 취하였을 적에, 우리의 학교에서 한글과 우리말이 사라지고 심지어 거리와 집안에서까지 우리말, 우리글이 그 자연스런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적에, 오직 기독교의 교회에서만은 성경이 한글로 적히고, 목사의 설교가 배달말로 유창하게 흐르고, 찬송가의 가락이 배달 사람들의 정서를 그대로 전파하였으니, 우리말, 우리 글의 수호의 공을 기독교에 인정하여야 마땅하다 하노라...(중략).

 3.1만세운동 이후, 비록 울산을 비롯한 전국의 만세 시위운동이 조국의 광복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국내적으로는 일제의 무단정치(武斷政治)가 소위 문화통치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국제적으로는 한국인의 독립 의지가 전 세계로 전해지면서 상해임시정부라는 국권의 대표기관이 수립되는 동기가 되었다. 이 역사적 쾌거에 그리스도인들은 전국에서 큰 역할을 감당했으며 울산에서도 앞장서서 참여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잘 인식하고 선배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을 거울삼아 오늘날에도 나라 사랑, 민족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다. 그것이 또한 성경의 정신이리라 믿는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