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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신앙에세이

“새로운 시각을 요청하는 땅, 도쿄”

  11월 들어 일본에서 또 6.3의 강진이 발생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주기적인 지진을 감내해 온 일본 국민의 고통이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기사를 본 후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의 안녕과 구원을 위해 잠깐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런 나의 태도는 이전과 비교해 분명 변화된 모습이다. 예전에는 환태평양 조산대에 놓인 일본의 고통을 그저 안쓰러워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어쩌면 내 마음 깊숙한 곳에는, 지진대에서 살짝 비켜나 있는 우리나라의 지질학적 위치를 다행으로 여기는 얄팍한 이기심이 숨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일본을 향한 마음에 진심 어린 변화가 일어난 건 작년 5월, 도쿄 가족여행 중에 직접 지진을 겪은 후부터다. 
  도쿄 가족여행은 아들이 모두 계획하고 준비해서 함께한 여행이었다. 이미 일본은 여러 차례 여행한 경험이 있었지만, 아들이 인도하는 자유여행이라 행복한 여정에 푹 빠져 있었다. 

복음 안에서 이 곳을 바라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외에는 어떤 소망도 가질 수 없다. 니느웨가 그러했듯 메가시티 도쿄도 구속사적 시각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다. (사진_Agoda.com)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28:19)

   잘 알려진 대로 도쿄는 일본의 수도이자 인구 사천만 명에 육박하는 세계적 메가시티이다. 뉴욕, 런던과 함께 세계 3대 도시에 속하며 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이기도 하다.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어 한국 관광객이 사철 내내 물밀듯 밀려든다. 거미줄처럼 얽힌 지하철과 광역 철도망을 이용해 도시를 누비다 보면 넘쳐나는 외국인 수에 서양의 한 도시에 와 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도시의 상징 도쿄타워와 스카이트리, 야경이 아름다운 레인보우브릿지, 천황 가족이 거주하는 황궁, 번화가인 신주쿠 등을 돌다 보면 하루해가 금방 저물었다. 도시에 밤이 내리면 시내 중심가의 야시장이 불을 밝히고 즐비한 골목 맛집들이 관광객들을 반겼다. 도쿄는 자유여행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여행지로 손색이 없었다.
  그런데 여행 넷째 날인 2023년 5월 11일 새벽, 집 전체가 흔들리는 감각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전날 걷기와 지하철 갈아타기로 피곤했던 탓에 깊은 잠에 빠져 있었음에도 체감되는 흔들림은 정말 컸다. 도쿄 앞바다에서 5.2의 지진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우리 가족은 에어비앤비 단독 숙소에 머물러 있었는데, 목조 주택이 얼마나 크게 흔들렸던지 간담이 서늘했다. 옆방에 있던 아들이 달려와 한국 유학생들의 커뮤니티에 따르면 이 정도의 지진은 일본에서 일상으로 겪는 일이라며 우리 부부를 안심시켜 주었다. 다행히 지진은 여진 없이 잦아들었지만, 이후의 일정은 더욱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닐 수밖에 없었다. 여정이 끝나고 비행기가 하네다 공항을 이륙하는 순간, 농담처럼 ‘이제 안심’이라며 웃었을 정도다. 창밖으로 멀어지는 도쿄 땅을 내려다보며 아들이 했던 말이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다. “역시 이웃이 행복해야 우리도 행복할 수 있는 거네요.”
  말 그대로 일본은 이웃 나라다 보니 역사적으로 우리와 깊이 얽힐 수밖에 없었고, 신문물을 먼저 받아들인 그들로부터 민족적 굴욕의 시간을 겪어야 했다. 지금도 여전히 정치·경제적 역학관계에 따라 국민감정이 큰 영향을 받곤 한다. 일본의 도시들을 점령한 신사(神舍) 앞을 지나갈 때마다 그 땅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게 되지만, 민족적 감정은 분명 내 집단 무의식에도 작동하고 있었을 테다. 더욱이 도쿄에는 메이지 천황을 기리는 메이지 신궁이 시내 중심에서 시민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어 속상했다. 메이지 천황은 1910년 한일강점조약을 체결한 장본인이 아니던가.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에 반감을 지녔던 요나 선지자의 마음이 순간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날 새벽의 지진 경험 이후 일본인의 고통에 주목하게 됐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다. 특정 민족이기에 앞서 그들도 결국 구원이 필요한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마음에 먹먹했다. 세상 모든 민족을 사랑하사 구원을 주시고자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그날 새벽의 경험이 오히려 감사했다. 어쩌면 일상처럼 계속되는 지진 속에서 불안해진 그들이 수천수만의 잡신을 만들어 위안으로 붙들고 있다는 생각에 연민이 느껴졌다. 도쿄 시내에 아사쿠사 신사를 비롯한 여러 신사가 도쿄 시민들의 신앙 처소가 되어 있어 마음이 아팠다. 
  한 개인이든 민족이든 서로 상처로 얽혀 있으면 상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상대의 장점은 보이지 않고, 단점은 더 크게 인식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부정적인 인식이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한 개인이나 민족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복음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밖에 없으리라. 누구든 어느 민족이든 하나님 앞에서는 초라한 죄인일 뿐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외에는 어떤 소망도 가질 수 없음을 인식할 때 가능할 테다. 니느웨가 그러했듯 도쿄도 구속사적인 시각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다. 정치·경제적 역학의 안경을 벗고 더 근원적인 영혼의 갈망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세계적인 메가시티 도쿄에서 들려오는 영적 신음이 언젠가 복음의 물결로 덮이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