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알고 믿는 것과,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사도행전 10장에서,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베드로에게 나타나 이방인 고넬료에게 가라고 하셨을 때에 베드로의 첫 반응은 거리낌이었고 불편함이었다. 또 갈라디아서 2장에서는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다가 할례자들이 왔을 때에 그들이 두려워서 그 자리를 떠난 베드로를 바울이 책망하는 장면이 나타난다. 가장 예수님 가까이 머물면서, 누구보다 복음을 많이 듣고 경험한 베드로였다. 하지만 여전히 복음을 알고 믿었던 그도 복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는 못하고 우월감과 차별의 태도로 사람을 대했다.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차별’이다. 또한 다문화 교회에서 가장 주의하고 민감해야 하는 부분 중 하나도 역시 이 차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안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그 차이로 인해 누군가에게 특혜를 주거나 불이익이 가게 해서는 안 된다. 차이는 좋은 것이지만 차별은 악한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차별을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차별은 한다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대놓고 차별을 하는 사람보다,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은근히 차별하는 사람이 더 위험하다.
한국 사회나 한국 교회에서는 차별하려고 차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아무런 차별의 의도 없이, 좋은 목적과 의도로 남을 돕고자 한 일이 상대방에게는 상처가 되고 차별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이주민들을 당연히 도움을 받아야 하는 도움과 섬김의 대상, 구제와 선교의 대상으로 대하거나, 뭔가 조금 다른 눈으로 동정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있다. 상대방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물어보고 상대방의 필요를 중심으로 돕기보다는 내가 생각하기에 필요할 것 같은 것을 주거나, 사진을 찍어 미디어나 언론에 자신의 단체를 홍보하기 좋은 것으로 도움을 주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이주민들은 그들의 포교와 선교의 대상이 되거나 홍보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는 비인간화(dehumanization)와 대상화(objectivization)의 경험을 하게 된다.
가장 차별이 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주일 예배 자리이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총장을 하셨던 에드워드 클라우니는 이렇게 말한다. “인종 차별은 범 교회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오래지 않은 과거에, 미국의 백인 교회들은 흑인 예배자들을 막기 위해 ‘인종 경찰’을 두곤 했었다. 다른 적합한 회중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교회는 가장 인종차별이 없는 공동체여야 하는데, 복음을 외친다고 하는 교회에서 인종을 분리하는 일들이 매우 자연스럽게 행해졌다. 그래서 흑인 인권 운동에 앞장섰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님은 “미국에서 가장 인종차별이 심한 시간이 바로 주일 오전 11시이다.”라고까지 말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라고 다를까? 한국 교회도 이주민을 위한 배려라고 하지만 은근히 차별을 하는 경우들도 있다. 이주민들을 한국인 성도들이 예배드리는 본당이 아닌 비전센터 또는 선교센터와 같은 곳에서 따로 예배드리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실용적이고 문화적이며 사역적인 이유들이 있다. 나름 좋은 의도를 가지고 배려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주민들의 상당수는 한국인들과 함께 예배드리지 못하는 데에 아쉬움과 박탈감을 느낀다. 그런 의도는 없었겠지만 하나님 나라의 2등 시민이나 뭔가 하등하고 열등한 성도라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특히 1년에 한 번 ‘선교주일’이나 ‘이주민의 날’과 같은 이벤트는 오히려 추측에 불과했던 이런 느낌을 더 분명하게 확인시켜 준다. 이주민의 날이라고 하면서 1년에 한 번 한국인 성도들과 함께 공식적으로 본당에서 예배드리도록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주민 성도들이 전통의상을 입고 각 나라의 깃발을 흔들거나, 한국인 성도들 앞에서 연극, 특송과 같은 전통 공연을 선보이는 것이다. 누구를 위한 날이며, 누구를 위한 이벤트인가? 많은 교회들이 이주민의 마음을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자기 자신들을 위한 행사들을 진행한다. 이것은 우리가 믿는 복음에 합당하지 않은 모습이다. 이제 이런 건 제발 그만하자.
이런 일은 한국 교회 역사 속에도 있었다. 사무엘 무어 선교사가 섬겼던 곤당골 교회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무어 선교사는 백정 박씨의 장티푸스를 치료하기 위해 당시 왕의 주치의였던 에비슨 선교사를 데리고 왔다. 결국 그의 병은 나았고 이 소문을 들은 수많은 백정들이 곤당골 교회로 모여들었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불편하게 여긴 이들이 있었는데 바로 그 교회에 출석하던 양반들이었다. 양반들은 신분 제도가 엄연히 존재하는 조선 사회에 양반들이 천민이었던 백정들과 한 공간에서 예배할 수 없다며, 무어 선교사에게 분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복음에는 어떠한 차별이 존재할 수 없다’고 믿었던 무어 선교사는 그들의 요청을 거절했고 결국 기분이 언짢았던 양반들이 그곳을 떠났다가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양반과 백정이 함께 예배하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백정 박씨는 그 교회의 장로가 되는 역사적인 일도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신분의 차이를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복음의 능력이었다. 복음 앞에는 어떠한 장벽도, 인종이나 국적, 신분이나 사회경제적 차이도 힘을 쓸 수 없다. 복음이 분명히 선포될 뿐 아니라, 그 복음을 내면화해서 복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공동체에는 어떠한 차별도 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우리 교회 남아공 자매인 Lucia는 이렇게 교회를 자랑한다. “저는 울산에 살면서, 길을 가거나 버스를 타도, 식당이나 마트에 가도, 직장에 일하러 가도 단 한 번도 차별을 겪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항상 긴장하며 살았어요. 하지만 우리 교회에서는 절대 그런 일이 없어요. 울산에서 유일하게 차별이 없는 곳이 우리 교회에요.” 남자들은 왜 여성들이 어두운 밤길을 혼자 갈 때, 낯선 남자와 엘리베이터를 탈 때 두려움을 겪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인들은 외국인들이 얼마나 항상 차별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를 갖고 사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복음이 중심이 되는 교회 공간에서만큼은, 주일예배 시간만큼은 차별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팀 켈러 목사님이 한 말이다. “교회를 통해 인종의 벽을 뛰어넘는 파트너십과 우정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복음 임재와 권능의 증표라고 할 수 있다. 민족적이고 문화적인 정체성이 쓸데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더 이상 그것이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이해하는 주요 잣대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를 사이에 두고 맺은 연합은, 같은 인종이나 민족 구성원들 간의 관계보다 강력하고도 견고하다.” 그렇다. 교만이든 우월감이든,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차별이든,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제는 복음이다. 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복음이 중심이 되는 우리 교회 때문에, 울산에서 가장 인종차별이 덜한 시간이 바로 주일 오전 11시이다.” 우리 한국 교회들이 복음이 중심되고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복음 중심적인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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