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 하늘이 맑아 높푸르게 보이는 가을,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산으로 들로 나들이 하기 참 좋은 가을이 왔건만 사색할 여유도 없이 보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산천초목은 단풍들로 곱게 물들었고, 땅에 떨어진 낙엽 이불을 밟을 때에 바스락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을때에 많은 여운이 남았다. 겨울을 준비하는 언저리에서 예수 이불로 따뜻하게 덮어주는 것을 보면서 마음을 나누고 싶다.
예수 이불1) 故 이경근 선교사
고 이경근 선교사는 제2영도교회 출신이다. 나는 고 이선교사님이 섬겼던 교회에서 17년째 담임목사로 목회하고 있다. 선교사님과는 신학교 다닐때에 인사 정도하는 사이로 지내다가 1999년 처음 담임목사한 교회에서 이 선교사님을 후원하다가 교회 형편상 선교사님을 후원하지 못하게 되었다. 세월이 흐른 후 어느 날 선교사님을 만났는데 선교사님은 아쉬운 마음이 너무 크셨는지 “목사님 왜 내 후원을 끊으셨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하시는 말씀에 무척이나 당황했고, 미안한 마음이 든 적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흘러 제2영도교회에서 목회하는 가운데에 다시 선교사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 모교회에 담임목사로 오셔서 진심으로 감사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셨다.
특히 금년 4월에는 우리교회에서 KPM 선교사님 5가정을 모시고 “선교축제”를 했다. 이때에 참석하신 이 선교사님은 참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즐거운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며 행복한 동행을 하였는데, 뜻하지 않는 질병이 발병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제 이 땅을 떠난 선교사님은 주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안식처로 가셨지만 남겨진 우리들의 마음에는 허전함과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선교사님과 함께 사역한 서근석 인도선교사의 편지글이다.
“형님은 지난 10월7일(월) 64세의 일기로 천국으로 훌쩍 떠나갔습니다. 5월 발병을 확인 후 불과 몇 개월 만에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그의 생 마지막 10여 년가량 선교사회와 본부에서 함께 동역했습니다. 그는 저에게 친형제보다 더 친한 좋은 형님이셨습니다. 형님의 췌장암 발병 소식을 듣고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저도 그 충격 때문인지 면역이 떨어져 대상포진, 치쿤 구니야로 고생 중입니다.(중략)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필리핀에 파송 받아 선교사역 중 괴한의 총격을 받아 사경을 헤맸습니다. 2년여 투병 끝에 기사회생했습니다. 그래서 병원 냄새가 싫다고 했습니다. 회복 후 말레이시아로 다시 떠났습니다. 모두 한사코 만류했지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겠다.’고 다시 현장으로 갔습니다. 여러교회, 단체, 방송에서 총에 맞고 살아난 선교사에게 간증을 부탁했습니다. 그의 몸에 총상만 보여줘도 소위 뜨는 강사가 될 수 있었지만 다 고사했습니다. 훈장처럼 자랑할 수 있지만 그 유혹을 떨쳤습니다. “군대 가면 군인들이 운동장에서 줄 맞춰 가다가도 호각소리 한 번에 뒤로 돌아갑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자랑할 거 하나 없습니다. 주님이 호각 한 번만 불면 처음이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처음이 됩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그의 설교 중 예화) 그는 자신의 설교처럼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늘 주님만 자랑하는 믿음과 소망의 사람이었습니다. (중략)
무엇보다 그는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신학대학원 채플에서 설교하고 돌아와서는 “<한 교회 한 신학생 돕기>를 한다고 해서 300만 원 헌금하고 왔다. 설교 때 저도 한명 돕겠습니다. 하고 나중에 집에 오려고 하는데 다시 보니 <한 교회 한 신학생 보내기>운동이더라.” 사실은 가난한 신학생을 돕고 싶은 마음이 컸겠지요. 아들 결혼 후 받은 축의금 반은 아들이 졸업한 한동대에 반은 모교인 고신대에 거금을 헌금했습니다. 그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갔는데 고신대 지인이 알려줘서 형님께 믈으니 “내가 평생 교회밥 묵고 살았잖아. 우리 아들 교회에서 키워 주셨는데 감사할 줄 알아아지.” 하고 답했습니다.
선교지에 가서 이중틱장애를 겪던 어린 아들이 “정상으로만 살게 해주세요!.” 기도했는데 미국에서 변호사가 돠었습니다. 그 아들이 보내준 용돈을 모아 고신대 태권도 학과에 장애를 가진 어머니를 둔 학생과 가난한 학생 2명을 매달 30만 원씩을 아무도 모르게 도왔습니다. 정작 자신은 5년 동안 사시사철 어디를 가던지 늘 친구인 홍영화 본부장이 사준 바지 한 장만 입고 살았습니다. 보다 못해 바지 하나 새로 사라고 했더니, 새 바지 사서 입고 좋다고 자랑을 하더군요. 얼마냐고 물으니. “만원!” 그렇게 아낌없이 나누고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다가 그는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완벽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뭘 잘 잃어버리고 물건을 자주 떨어뜨리고 어디에 폰을 두고 오고 늘 손이 많이 가는 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이 더 이상 뭘 잊어버리지도 않 고 차 태우러 오라고 하지 않아 섭섭할 거 같습니다.(생략)”
이 선교사님은 이웃들에게 예수 이불을 덮어준 감동의 삶이었다.
예수 이불2) 김정열 집사
누구에게나 버킷리스트가 있다. 건축업을 하시는 김정열 집사님의 버킷리스트가 생각난다. 김집사님은 비신자로 살다 2008년 제2영도교회 교회당을 건축하셨고, 그때부터 신앙생활을 하셨다. 교회 건축을 생각해 보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그 당시 교회부지가 갑자기 뉴타운지역으로 바뀌어 신축, 증축, 개축이 안되는 지역이 되었다. 참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 했을 때 삼위 하나님이 움직이고 계셨다. 마치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길을 열어 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그런 혜택을 주신 분이 계시는데 그 중에 한 분이 김정열 집사님이다. 김 집사님은 등산을 좋아한다. 그동안 국내에 이름있는 높은 정상들을 4백여 개나 올랐으며, 한라산, 백두산을 비롯해서 일본 후지산도 등정하여 접수했다.
산을 좋아하는 김집사님의 버킷리스트는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까지 트레킹하는 것이었다. 아내인 한경애 집사님의 물심양면의 후원을 받고 드디어 이 꿈이 이루어졌다.
지난 10월 말 김 집사님은 일면식이 없는 일행들과 함께 네팔 카투만두를 걸쳐 히말리야를 등정하게 되었다. 꿈에도 그리던 산지에 도착한 후에 산악인들이 안전과 무시 귀환을 여신에게 기도했다고 했다. 그 후, 김집사님은 고산에 적응하기 위해 4시간 정도 산행을 했는데 그 때 다리에 나타난 이상징후로 인해 불길한 생각이 들어 번민과 고민이 가득하게 되었다. 하지만 역사는 그날 새벽에 일어났다.
새벽에 일어난 집사님은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왜?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하고, 히말리야 여신에게 기도했을까? 후회하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하나님, 제가 어렵게 이곳까지 왔는데 건강하게 산행을 잘하고 하산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요.” 간절히 기도하고, 신기하게도 건강이 회복되고 마음에 평강이 찾아왔다.
그 후에 산행을 할 때에 “나를 부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듣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내가 어디 가는지 당당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며, 예수를 자랑하여 살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 김집사님은 은혜 가운데 무탈하게 버킷리스트를 잘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김집사님과 함께 한 식사 자리에서 집사님의 고백을 들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주님은 이번 일로 김집사님의 비전과 믿음 위에 예수 이불로 덮어 주셔서 따뜻한 믿음의 온기를 경험하는 복된 시간을 주셨다는 고백에 큰 울림을 주었다.
이들의 삶을 덮어준 예수 이불이 또 누구의 삶에 덮어질까? 기대감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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