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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교계일반

"구원의 이웃"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사진_pixabay_falco)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10:36~37)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단순히 착하게 선행을 베풀며 살라는 말씀이 아니라 <영생에 이르는 길>에 관한 말씀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의외로 쉽지 않은 비유의 말씀이다.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뜻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어렵고, 또한 그 말씀을 적용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시험하였던 율법 교사는 율법의 핵심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율법의 주제와 결론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면 구원에 이르는가? 그렇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는 은혜가 없이, 그리고 믿음 안에서 주어지는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그 말씀을 행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죄인이기 때문이다. 구원받지 못한 죄인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이웃을 사랑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영생의 길에 지나지 않는다.

  선한 사마리인인은 먼저 예수님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받아주시고 그들과 교제하심으로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이라 비웃음 당하시고 조롱당하셨다. 

  죄인이 영생에 이르기 위해서는 강도를 만나야 한다. 생명에 이르게 하는 율법인 줄 알았는데, 율법이 나를 정죄하는 사망의 법임을 깨닫고 오직 은혜만을 절실히 기다리는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이다. 강도 만난 사람이 강도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사마리아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부정하다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의 접근을 맹렬하게 배척했을 것이다. 

  강도 만난 사람이란 하나님의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자신이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죄인임을 깨달아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겸손히 받아들이는 사람을 의미한다.

  율법 교사가 영생에 이르기 위해서는 강도 만난 사람이 되어야 했다. 자신이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자신만만함이 깨어져서 죄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무력한 자신의 모습을 깨달아야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된다. 강도 만난 사람을 지나쳐간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였다. 껍데기뿐인 종교, 율법주의적인 종교, 심지어 참된 신앙의 능력을 결여한 외적인 종교조차 강도 만난 자에게 사실상 아무런 도움을 줄 수가 없다.

  거듭나야 한다. 거듭나면 관점이 바뀐다. 율법 교사는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질문했다. 율법 교사에게 세리, 창녀, 이방인들과 같은 사람들은 결코 이웃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마지막 심판 때에 자신을 정죄하게 될 율법과 동일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옳고 그름의 관점으로 남을 판단하는 관점으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율법 교사의 마음속에 참된 구원의 은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증이었다.

  영생의 길을 걸어가는 구원받은 사람은 율법 교사의 기준에서 이웃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사람을 이웃으로 여기고 그에게 섬김으로 다가간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께서 죄인인 나에게 그렇게 찾아오셨고 만나주셨고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의 기준을 가지고 이웃들을 바라본다. 그에게는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이 이웃이다. 구원받지 못한 죄인이 이웃이다. 구원받지 못한 이웃에게 내가 <구원의 이웃>이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영생의 길이다.

우리도 여전히 율법 교사처럼 율법 교사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간다. 

  가족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하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가족은 내가 친하게 지내야 할 이웃이 아니라 원수라고 여긴다. 그래서 관계를 끊고 살고, 심지어 부부간에도 이혼한다. 이것은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갖는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관점이 바뀌면 가족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 구원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할 은혜의 대상으로 보이게 된다. 나를 속 썩이는 자녀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원수가 아니라, 그들이야말로 나로 하여금 참된 신앙의 반응으로 반응하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시고 만나게 하신 사람들이다. 내가 그들에게 구원의 이웃이 됨으로, 오히려 그들이 나에게 영생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들이 된다.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강도 만난 나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의 은혜가 구원받은 나를 통하여 계속해서 흘러가게 하는 것, 이것이 나를 영생에 이르게 하는 길, 참된 믿음의 길이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나를 사마리아인 취급하여 비웃으며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던 가족, 아내, 남편, 친척에게 내가 구원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 나를 사마리아인 취급을 했던 그들에게 나는 복음을 들고 복음을 순종하여 구원의 이웃으로 다가가야 한다. 이것이 참된 믿음의 길이요 영생의 길이다.

울산구영교회 황태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