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 16:9) 환상을 보고 아시아로 가려던 생각을 내려놓고 유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바울을 태운 배를 “유럽의 역사를 바꾸는 배요. 유럽 문명의 미래를 안고 가던 배”라고 했는데 그 여정이 사도행전 16장에 나온다. 그곳에는 사도행전의 어떤 본문보다 하나님의 손길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기적이 계속해서 펼쳐지고 있다.
첫 번째 기적은 이틀 만에 도착한 배이다. 2천 년 전의 배는 지금과 같은 쾌속정이 아니다. 드로아에서 빌립보까지 최소 닷새가 걸리는 뱃길이다. 그런데도 바울은 이틀 만에 도착했다. 하나님이 순풍을 만나게 하셨고, 바울의 배를 뒤에서 힘껏 밀어주셨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기적은 빌립보교회이다. 바울이 유럽에 첫발을 딛고 만난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하는 기도를 매일 드렸다고 한다. 그러니 사회적으로 초라하기 짝이 없는 여인네들을 데리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하나님은 여자 루디아를 통해 유럽 최초의 교회인 빌립보교회를 세우셨다.
세 번째 기적은 귀신 들린 여종의 회복이다. 기도하기 위해 이동하던 바울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났다. 그냥 지나칠 바울이 아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다. 물론 바울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주셨다.
네 번째 기적은 지진이다. 귀신 들린 여종이 회복되자 돈줄이 끊기는 것을 걱정한 여종의 주인들이 바울의 목숨 줄을 끊으려고 했다. 많이 맞은 바울은 옥에 던져지고 그것도 모자라 두 발에 차꼬까지 채워졌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감옥을 덮쳤다. 그러자 감옥 문이 열리고 바울의 차꼬가 벗겨졌다. 이것은 흔히 알고 있는 지진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벽과 지붕이 무너져 바울은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을 것이다. 분명 감옥이 흔들렸는데 건물을 멀쩡한 대신에 감옥 문이 열리고 쇠사슬이 벗겨졌다. 하나님이 감옥을 흔드셨고, 감옥 문을 열어 젖히셨고, 차꼬를 풀어주신 것이다.
바울의 탄 배가 최소 5일이 걸리는 길을 이틀 만에 도착한 것,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여자 루디아를 통해 유럽 최초의 교회인 빌립보교회가 세워진 것, 귀신이 떠나고 점치는 여종이 회복된 것, 기적이다. 무엇보다 감옥이 흔들리고, 감옥 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려진 것, 기적 중의 기적이다.
하지만 진짜 기적은 다른 곳에 있다. 솔직히 이런 기적은 별로 눈이 가지 않는다. 이런 것은 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까 별로 놀랍지 않다. 진짜 기적은 사도행전 16장 25절에 나온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한밤중에”라고 했는데 이것은 단순히 바울이 갇혀 있는 시간으로 알려주기 위함이 아니다. 그만큼 바울이 당한 일이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절망적이라는 말이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깊은 어두움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지금 바울은 한밤중을 제대로 맞았다.
그러면 왜 바울이 투옥되어 한밤중을 보내고 있는가?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길이 막혀도 어떻게든 아시아로 가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에게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여주면서 그를 유럽으로 몰아가셨다. 이 환상을 본 후 바울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서 빌립보에 왔다. 그러다가 투옥된 것이다. 아시아로 갔으면 이 고생을 했을까? 순종해서 왔는데 이게 뭔가? 그러니 바울은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유럽으로 와서 이 험악한 꼴을 당하게 되었다.
바울이 도착했을 때를 떠올려 보라. 순종해서 왔지만 모든 것이 잘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의 발길을 유럽으로 돌리셨으면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만반의 준비를 다 해 놓고 기다려야 하시는 것 아닌가?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수행원이 영접해서 5성급 호텔로 안내해야 하는 것 아닌가? 거칠 것이라고는 전혀 없고,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바울이 유럽에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여인들이었다. 순종해서 건너왔는데 사역의 첫 대상이 사회를 주도하던 남자가 아니라 여인 몇 명이었다. 바울이라고 왜 더 지위가 높은 사람,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 힘 있는 남자들과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게다가 바울은 회당이 없어서 강가 모래 바닥에 앉아 초라하게 복음을 전했다. 말이 좋아 강이지 우리식으로 하면 동네 빨래터이다. 이런 곳에서 무슨 선교가 되겠는가? 바울이라고 왜 더 좋은 장소, 더 쾌적한 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사역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바울은 군소리하지 않아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그렇게 한 결과가 숱하고 맞고, 감옥에 갇히는 것인가?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히는 것은 놀랍게도 바울은 그 한밤중에 기도하고 찬송했다. 바울의 감방에서 기도와 찬양의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심한 매질을 당한 탈진한 상태에서 나오는 가느다란 소리가 아니었다. 바울은 다른 감방의 죄수들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찬양했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기적 아닌가? 기적 중의 기적 아닌가?
감사의 계절이다. 무엇으로 감사하려고 하는가? 이런저런 기적이 일어나야 감사할 것인가? 혹시 한밤중을 보내고 있어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가? 쓰러진 그 자리를 기도의 자리로 바꾸시라. 탄식의 자리를 찬양의 자리로 바꾸시라.
그리하여 기도와 찬양으로 그 최악의 상황을 천국으로 바꾸는 진정한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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