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근본적으로 부패되었다. 지.정.의 모든 영역이 그렇다. 그러므로 전인적인 영역에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야 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선한 일군들 중에 이해하기 어려운 자녀들을 보게 된다. 대표적인 사람이 사무엘이다.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의 가교역할을 했던 사무엘에게서 기괴한 행동의 자녀들이 태어난 것이다. 그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는 돈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한다.(삼상8:1-3) 또한 히스기야는 어떠한가? 죽을 병에 걸렸던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시고 그의 생명을 15년간 연장 시켜주었는데, 연장된 생명의 기간에 태어난 므낫세은 12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아버지의 길을 따르지 않고 그 어린 나이에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았다.”(왕하21:2)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사과나무에서 가시가 난 것이다. 인과율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와 반대되는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왕이 유대16대왕인 요시야이다. 그가 왕으로 등극 할 때만 해도 모든 환경이 열악했다. 영적으로는 할아버지 므낫세와 아버지 아몬이 자행했던 우상숭배와 가증스러움은 극에 달했다. 아버지는 피살되어 죽임을 당했다. 요시아의 마음은 절절히 아픔이었고 혼란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세에 왕위에 올랐던 요시아는 성경말씀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한”(대하42:2) 길을 걸었다. 그 결과 유대왕국이 멸망하기 전 마지막 종교적 부흥기를 누렸다.
여기에 인과율이 어디 있는가? 악한 아버지 밑에 어떻게 이런 왕이 나올 수 있는가? 그렇다. “은혜”로 설명하지 않으면 설명할 길이 없다. 8세였던 요시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다. 현재 중년과 노년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의 어릴적 삶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결같이 고백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노라고...”
그런데 이제는 내게 주신 “8세인 나의 자녀”를 우연에 맡기기를 두려워한다. 내가 붙들고 가르쳐야 하고, 남겨야 하고, 더 탁월한 환경에서 교육받게 하고 싶어한다. 인과율을 우상처럼 믿는 듯하다.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면 휼륭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는 것 같다.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에게는 인과율이 아니라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마귀는 오직 “인과응보”에 속해 있다. 욥을 참소할 때에도 인과율을 가지고 접근한다. 그가 그가 “까닭없이(욥1:9)” 하나님을 섬길 리 없다고 한다. 이것이 마귀의 한계다. 욥은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그는 그 입술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여전히 하나님의 은헤를 구하며 예배자로 선 것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이다.(고전2:14) 그래서 그들은 은혜를 구하는 모든 일련의 태도를 멸시한다.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는 통로는 3가지이다. 말씀과 기도와 성례이다. 이 3가지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 그렇다. 예배다.
“8세의 의미”는 예배를 세우는 것이다. 요시아의 가정은 어둡고 어두워 길이 보이지 않았지만 요시아 곁에 예배를 심어주고 함께 그 길을 걸었던 힐기야 제사장이 있었다. 빛은 모든 어둠을 몰아낸다. 은혜는 모든 인과율을 걷어낸다.
“유튜브 볼래?” “예배 드릴래?”
이것이 부흥을 결정짓는 갈림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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