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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교계일반

"눈물이 사라지면 모순만 남는다."

”마틴 루터는 잘못된 교황의 권위에 항거하여,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리를 논박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오직 믿음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통한 구원을 강조했다. (사진_위키백과)

  베를린에서 60킬로 떨어진 인구 5만의 도시 비텐베르크는 1938년부터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 게시판에 95개 반박문을 걸고 시민 토론을 제안했다. 핵심논지는 “우리 인생의 진정한 기준이 누구인가”와 “면죄부의 효용성”에 관한 것이었다. 이 반박문은 당시에 삶의 기준이 교황이라고 믿고 따랐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의거하지 않고 면죄부에 의해서 죄사함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중세 시대를 도도하게 관통하고 있었던 세계관은 “인과론”이었다. 이는 행위에 의한 구원과 죄사함을 말하며, 그 요구되는 행위로 십자군전쟁에 젊은이들을 내몰기도 하였고, 돈 있는 자들은 면죄부로 그 행위를 대신하기도 했다. 행위를 통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인관론적 구원관이 우리 인생을 악의 굴레에 얼마나 깊게 종속시키는지 모른다. “접시를 몇 개를 닦아야 엄마의 칭찬을 들을 수 있을까요?” 아무리 닦아도 칭찬(구원)에 미치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감은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과 도전, 사회참여와 나눔에 자연히 소극적으로 반응하게 한다.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발견된 “이신득의”(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다)는 그야말로 “유레카”를 외치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만난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으로 그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 것이니(엡2:8) 그 구원은 취소되지도 않을뿐더러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구원이기에 안심해도 되는 영생의 복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창세 전에 나를 택했다는 구원의 예정론은 눈을 감고 앉았다 하면 눈물로 범벅이 되게 했다. “어떻게 나 같은 자에게 이런 은혜를 주셨는지…”여기서 감격과 감사가 터져 나왔다. 이러한 감격이 두려움 없이 생생하게,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회 속에서 나타나서 자본주의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막스 베버, 프로테스탄스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하나님의 은혜의 예정과 믿음의 선물이 감격의 눈물 속에서 묻어나와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게 된 것이다. 

  혹자는 “구원을 예정하셨다”라고 하니, 그게 말이 되나? 라고 반박하며, 어떻게 나만 구원할 수 있나? 그것은 불공평하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들은 한 측면만 보는 개념이기에 모순같이 보일 뿐이다. 바닷가에 배가 파선되어서 많은 사람이 죽어간다. 구조대원 힘을 다해서 5명을 구조했다. 생명 건 일이다. 훌륭한 일이다. 근데 불공평하다고 말한다. 왜 5명만 구했나? 이런 주장을 한다. 희생을 통해서 건짐 받은 것을 공평의 잣대로 보니 모순처럼 보이는 것이다. 고아원에서 한 명을 입양하면 불공평한 것인가? 아예 아무도 입양하지 않는 것이 공평인가? 그런 주장은 오히려 몰지각한 것이다.

  사랑을 해 봤는가? “Fall in Loving” 한 사람에게 푹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런데 그 남자보고 “어째서 당신은 이 세상에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한 여자만 사랑하는 것이 말이 되냐 그건 불공평하다”고 말할 사람 없다. 

  눈물이 없으니 사랑이 공평의 문제로 나오는 것이다. 제한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사랑이다. 이건 공평으로 이해할 문제가 아니다. 

  나 같은 자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너질 때 주체 할 수 없는 눈물이 있다. 메마른 눈물에서 어떻게 깊은 사랑을 경험하겠는가? 

  예정론의 약화는 신학의 부재가 아니라 눈물의 메마름에서 오는 것이다. 요즘 안구건조증 환자가 많다고 하는데, 안구건조증이 아니라 은혜의 메마름으로 인한 질병은 아닌지 물어 볼 참이다.

울산의빛 편집국장 최성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