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천국 선포
마4:18~25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요약한다. ‘가르침과 고침’, 두 가지가 핵심이다. 4:18~22까지 네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은 그분의 말씀 곧 가르침이 권위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주님의 부름은 네 사람이 하나같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라야 할 권위 있는 명령이었다는 뜻이다. 그들의 반응은 조용하지만 단호하고 결정적이다. 삶 자체가 완전히 변한다. 모든 것을 다 버려도 좋을 뭔가를 부르시는 말씀에서 본 것이다.
그게 뭘까? 메시야의 생명과 빛이다. 이어지는 23~25절은 고치시고 회복시키심으로 드러내신 천국의 ‘능력’이다. 특징적인 것은 ‘모든’이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신다. ‘모든 앓는 자들’이 몰려와 고침을 받는다. 23~24절의 ‘온 갈릴리, 온 수리아’에서 ‘온’이라는 말과 25절의 ‘수많은’ 역시 같은 의미의 단어다.
즉, 주님이 선포하신 ‘천국’의 능력은 모든 영역, 모든 사람, 모든 한계를 지배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당시 갈릴리를 다스리던 헤롯이나 유대를 점령하고 있던 ‘로마의 통치’가 실제적으로는 얼마나 무능한지를 폭로하는 선지자적인 행위였다. 땅의 어떤 권력이나 나라도 손 쓸 수 없는 인간의 궁극적 절망까지도 메시야는 다스릴 수 있음을 시위하셨던 것이다. 그게 마9장까지 이어진다.
핵심은 말씀
예수님은 ‘가르침과 고침’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는데 가르침은 가르침대로, 고침은 고침대로 지혜롭게 활용하신다. 어느 쪽으로 넘치거나 치우치지 않으시고 균형 있게 쓰시면서 메시야 소명을 성취해 가신다. 하지만 우리의 입장에서, ‘가르침과 고침’을 균형 있는 태도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당장에 병이 낫고, 귀신이 쫓겨나고, 이적을 체험하는 등의 역사가 더 매력 있고 끌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전한 신앙을 위해서는 이 문제를 잘 정리하고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질문하면서 답을 찾아보면 좋을 것 같다. “주님은 어디에 핵심을 두셨을까?” 어떤가? 확실히 갈래가 보이지 않는가! 답은 가르침이다. 비록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열광적으로 반응했던 것은 치유 곧 고치심이었지만 천국의 핵심은 말씀이다. 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가?
첫째, 궁극적인 상황을 대입해 보면 알 수 있다. ‘고치심’은 한시적인 조치이다. 생각해 보라! 천국에는 치유가 없다. 아픈 것도 죽을 일도 없으니까. 그러니 고치심은 주님 다시 오시기까지의 한시적인 조치이며 은혜다.
하지만 순종은 영원하다. 말씀의 주님과 누리는 교제는 신자의 영원한 복이다(벧전1:25, 사40:8). 이어지는 내용을 봐도 알 수 있다. 마태는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을 확연하게 구분한다. ‘제자’가 있고 ‘무리’로 불리는 집단이 있다. 마5:1~2에도 그렇다. 예수님의 궁극적 관심이 어디 있었을까? 제자들이다. 이적과 능력에 환호하던 무리에게 주님은 마음을 주지 않으신다(막1:38). 오병이어 후에도 당신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던 열광적인 무리에게서 떠나실 뿐 아니라 그 전에 먼저 제자들을 반대편으로 보내버리신다(마14:22).
예수님 공생애 사역의 핵심은 ‘무리’ 중에서 ‘제자’를 길러내는 사역이었다. 물론 수많은 무리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푸셨다. 쉬지 못하시고 주무시지도 못한 채 그들을 섬기셨다. 때로는 오천 명까지도 먹이는 권능을 기꺼이 베푸셨지만, 예수님의 궁극적 관심은 언제나 제자들에게 있었다.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천국 백성들이다. 그 절정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120명의 제자들이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던 자들이다. 구약 12지파를 이루었던 야곱의 열두 아들을 대체하는 열두 명의 사도에 완전수 10을 곱한 것이 120명의 제자인데. 십자가와 부활로 새롭게 창조하시는 새 언약 백성의 준비가 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보라! 이들에게 성령이 내리셨다. 과연 이 장면이야말로 예수님 지상 사역의 궁극적인 결실이며 절정이라 할 것이다. 그들을 통해 열방을 향한 천국의 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부활,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의 통치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이 곧 그 왕의 실록 제1권이다.
앎과 삶이 만나는 자리
자, 그러니 명백한 사실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칭송하고 열광하는 무리가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여 헌신하는 제자들에게 있다. 바로 그들이 천국을 이 땅에 실현하는 자들이다. 천국은 ‘앎’이 ‘삶’과 만나는 자리에 열린다. 가르치신 진리를 자신의 전인격을 통해 펼쳐야 한다. ‘안다’가 허물을 벗고 ‘산다’로 거듭나는 순간, 천국의 능력이 발현된다. 앎과 삶, ‘안다와 산다’ 사이에 기도가 있다.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고 기도하며 맞이한 오순절이 사도행전으로 이어짐을 기억하라! 기도는 객관적인 말씀을 주관적인 사명으로 전환하는 변속기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 명하신 것들을 내 삶, 내 가정과 직장, 현장에 적용하게 하는 전환 장치가 기도라는 말이다. 아무리 엔진이 힘차게 돌아가고 있어도 변속기의 기어가 중립에 있으면 차는 한 걸음도 못 나간다. 그래서 가르침 중의 가르침인 산상보훈의 중심부인 6장에 주기도문이 배치되어 있지 않은가! 기도는 배움의 열매다. 기도가 없는 배움은 껍데기일 뿐이다.
천국, 장래의 소망 현재의 소명
정리해 보자! 천국은 우리가 장래에 참여할 영생 복락의 약속인 게 틀림없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금 살아야 할 삶의 방식이며 책임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반드시 말씀을 배우고 알아야 할 뿐 아니라 기도를 통해 삶으로 전환하는 능력까지 연마해야 한다. 세상은 결코 가질 수 없는 우리만의 특권이다. 말씀을 들어야 한다.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그 ‘앎’을 ‘삶’으로 전환해야 한다. 수천 년을 묶은 말씀의 깊은 진리와 능력을 지금 내 삶의 현실에서 펼쳐내야 한다. 주님의 통치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실증해야 한다. 그게 주님이 찾으시는 천국 백성이다. 천국은 이런 자들을 통해 세상에 빛을 밝힌다. 주님의 천국, 그 열쇠는 ‘사람’이다. 복음의 능력을 자신의 삶으로 시위하는 사람, 바로 그를 통해 장래의 천국은 현재에 얼굴을 드러낸다. 신자는 이 땅에서 이미 천국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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