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한 분을 붙잡는 믿음의 사람은
다윗처럼 주님이 가신 길, 좁은 길을 택한다
“참으로 내가 당신과 함께 군대로 달립니다.
내가 나의 하나님과 함께 벽을 뛰어 넘습니다.”
괘만루일(掛萬漏一)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걸 괘, 일만 만, 샐 루, 하나 일. ‘만 가지 일에 신경쓰다 보니 정작 중요한 한 가지를 놓쳐 버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만 가지 걱정이 있어도 하나님 한 분을 붙잡고 달려가며 어려움들을 돌파해 나가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괘만, 만 가지 생각을 마음속에 걸어 놓고 정작 붙들어야 할 하나님은 붙잡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근근히 살아갑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괘만루일’ 하지 말고, 반대로 ‘괘일루만’, ‘오직 하나님을 붙잡고 모든 염려와 걱정을 다 버리라(벧전5:7)’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한 분을 붙잡는 사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종종 우리는 기독교인이 된 이후로 재미없는 삶을 살게 되었고, 내 성질대로 살지 못하기에 무력하고, 세상과 동떨어져 부적응자로 살게 되었다고 이야기 하는 간증을 듣게 될 때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게 되어서 자기 마음대로 살지 못하게 되어 아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세상에서 즐기던 것들을 하지 못해 아쉬워하며 살아가는 것이 정말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삶입니까?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시18:29)”
본문에서 다윗은 어떻습니까? 다윗은 적군을 향해서 달리며 그 앞에 거치는 장애물인 담이 있을 때, 그 담을 훌쩍 뛰어 넘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적군’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적’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심각한 단어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골리앗은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의 종이 된다고 말합니다(삼상17:9). 적에게 지면 따라오는 것은 ‘종’의 신분이기에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심히 두려워하고 도망하였습니다(삼상27:24).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는 무늬만 크리스쳔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하니’(삼상17:32)
믿음의 사람, 신앙의 사람은 좁은 길을 택합니다. 그 길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고통이 수반 될 것도 알지만 그 길 끝에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고, 그 길을 걷는 동안 참된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또 무엇보다 그 길이 주님 가신 길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 길을 선택해 걸어가는 것입니다. 다윗이 혼자 골리앗을 상대한다고 하니 비정상으로 보이지만, 다윗이 정상입니다. 다윗처럼 정상적인 믿음의 사람은 적군을 만났을 때 도망치는 사람이 아니고 맞붙어 싸우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들로 이어져 있고, 하나님은 비록 적지만 그런 사람들을 군데군데 두심으로 믿음의 계보를 이어 나가십니다. 그들이 바로 ‘남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담을 뛰어 넘습니다.
‘담’은 우리 앞에 막힌 것, 장애물로 생각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담을 만나면 낙담하여 쭈그려 앉거나, 한숨만 푹푹 쉬며 어쩔 줄 몰라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그 담은 장애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뛰어 넘어야 할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영성신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A.W.토저 박사는 자신의 책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람은 항상 지옥을 향해 불기 때문에 천국을 향해 걷는 사람은 늘 바람을 안고 걸어갈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그 강풍을 안고 영원한 평안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바람을 등지고 산허리 양지바른 곳에 머물 것인지 스스로 결정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물러서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약한 사람도 아닙니다. 항상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며, 안된다고 말하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오히려 적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달려가는 사람이고, 담을 만났을 때 주님을 의뢰하고 그 담을 넘는 사람입니다.
창세기 49장에 보면 야곱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축복해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던 요셉에게 이렇게 축복합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창49:22)
아시다시피 요셉에게 얼마나 수많은 담이 있었습니까? 형들에게 팔려가고,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고, 그렇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잊혀 진 존재가 되어 버리고, 정말 수많은 담을 경험했던 사람이 요셉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그 담 앞에서 좌절하거나 실망하거나 포기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그때마다 하나님과 함께 그 담을 훌쩍훌쩍 뛰어 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앞에 적군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가 싸울 수 있고, 어떻게 우리 앞을 가로막은 높은 담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시18:29)
원어성경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의지하다’는 말은 전혀 없고 전치사 ‘베카’라는 단어만 있습니다. ‘베카’의 뜻은 영어로 ‘in(인)’입니다. 이 단어는 ~안에, ~속에라는 뜻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의미를 더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로 인하여, ~ 때문에’, 둘째, ‘~의 힘으로’, 셋째, ‘~와 함께, ~와 함께면’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본문 29절을 히브리 원문으로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참으로 내가 당신과 함께 군대로 달립니다. 그리고 내가 나의 하나님과 함께 벽을 뛰어 넘습니다.’ 내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내 능력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벽을 뛰어 넘습니다. 우리 앞에 적을, 담을 우리 주님만을 붙잡고 그분과 함께 훌쩍 뛰어 넘으시는 믿음의 성도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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