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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교계일반

"낮은 山이 낫다."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다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산악계의 전설로 불리던 한 여인이 있다. 남난희 씨다. 1986년 여성 산악인 최초로 7,455미터의 히말라야 강가푸르나봉에 올라 세상을 놀라게 하더니, 백두대간을 76일 만에 단독 종주해서 세상을 더 놀라게 하였다. “산은 오르기 위해서 존재한다”라고 하면서 정상만을 향해 올랐던 남난희 씨가 산에서 내려와 자신의 소소한 삶에 관한 스토리를 엮어 만든 책 제목이 “낮은 산이 낫다”이다. 

  그 책의 논지는 “산 정상은 산의 일부분인데 모두가 정상만을 향해 오르려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정상이 아니더라도 산 아래에서 누리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쩌면 그 말에 모두 동의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여전히 우리가 들을 요소가 있다.

  열정적인 전도와 사랑 넘치는 교회가 숫자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고 또 권장할 만 하지만 지나친 숫자에 대한 압박은 자칫 자기 공동체의 아름답고 중요한 기능을 잃어버리게 한다. 

 

  오롯이 정상만을 꿈꾸는 인생에 대해서 성경은 “자기로 사는 인생”, “해 아래의 삶”으로 이해한다. 다니엘이 바벨론의 총리가 되어서 본 것이 무엇인가? “허망함”이다. 한 사람만 앉을 수 있는 권좌에서 느부갓네살은 변덕스러우며, 두려움과 강박감에 사로잡혀 결국 그는 미쳐서 풀을 뜯어 먹는 정신이상자가 되었다. 그의 인생은 마치 광대같고 한편의 코메디 같았다. 솔로몬의 말년에 기록한 전도자의 고백처럼 그의 삶은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된 것이었다. 자기가 아니라 “예수로 사는 인생”만이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다.

  정상을 좇아가는 인생치고 하늘의 별을 보는 사람이 드물다. 아이러니다. 정상은 높은 곳인데 더 높은 곳에 있는 별도 한번 헤아리지 못하고 하루를 마감하니 어쩌면 그가 추구하는 정상은 신기루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산 아래와 중턱에는 홀아비바람꽃, 노루귀, 붉은대극, 개구리발톱…과 같은 야생화가 있다. 어디 그뿐인가? 그것을 보면서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 가만히 앉아서 시를 읊는 사람들….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오래전 손바닥만 한 잡지인 “리더스 다이제스트”라는 책에서 본 구절이 생각난다.

  “우리 목사님은 천만인을 두고 목회하려 하지만 나 한 사람을 두고는 목회하려 하지 않아요.” 세상에 있는 모든 목회자들과 사모들은 공감할 것이다. 천만인이라는 정상에 오르려 하다 보니 바로 곁에 있는 한 사람을 놓치는 것이다.

  정상을 오르려고 발버둥 치는 이들에게 한번 물어봐라! “왜! 그렇게 그곳까지 올라가야 하죠?” 아마도 답이 없을 것이다. 백두대간을 다 오른 산악인이 산을 내려와서 “정상만을 추구하지 마세요. 산 아래에서도 누릴 삶이 풍성해요”라고 소리치는 소리에 귀를 가만히 기울여보면 어떨까?

  예수님이 하늘 영광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와 같은 식탁에 앉으셨다. 그리고는 “내가 너희 곁에 내려왔으니, 너희는 그곳까지 무리해서 가지 않아도 된단다.”고 하시면서 자기 스스로 하늘에 계신 신(정상)을 찾아 나서는 어리석은 모든 종교를 단번에 거부하셨다. 정상에 올라야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강박증에서 벗어나려면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면 가능해진다.

  사도바울이 가는 곳마다 매를 맞고, 가는 곳마다 배신당하고, 배고프고 상처 입고.. 단 한 번도 정상에 오르지 못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기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딤후1:12)

  나로 살지 않고 “예수로 사는 인생”이 되면 사나 죽으나 삶이 아름답다. 살면 살아서 할 일이 있고 본향에 가면 그곳에서 부를 노래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예수로 사는 인생이다. 할렐루야 아멘

 

편집국